<성서의 민족들>
1)약속된 땅의 원주인 가나안(족?)20120915성경자료실
약 속의 땅! 하느님께서 정착지로 주셨다며 전쟁을 벌여 이스라엘이 차지한 그 땅은 본래 누구의 땅인가? 이전부터 그곳에 터 잡아 살아오던 여러 민족들의 땅이 아니던가, 그들은 비록 이스라엘 민족 위주로 서술된 성서에서는 뒷전에 밀쳐졌지만, 그들 또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내신 백성임은 분명하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의 삶과 역사는 어떠했는가? 이스라엘이 약 속의 땅을 차지하기 이전에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민족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성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한다.
신명기에서는 “햇족, 기르가스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신명7,1)등 일곱 민족이라고도 하고, 출애굽기에서는 기르가스족을 뺀 여섯 민족(출애34,11) 또는 기르가스족과 브리즈족을 뺀 다섯 민족(출애13,5) 이라고도 한다. 반면에 민수기에서는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민수35,10) 이라고 언급함으로써, 그 땅 전체가 가나안족의 땅인 양 전제해 놓고 있다. 또한 창세기에서는 앞서 말한 일곱 민족에서 가나안족과 브리즈족을 빼고 아르키족, 신족, 아르왓족, 스말족, 하맛족을 더해 모두 10민족을 통칭해 가나안족이라 부르고 있다(창세10,15-18).
어찌된 일일까? 땅 덩어리는 하나인데 그곳의 주인은 여럿이니, 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소유한 민족의 역사가 그만큼 단순치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실제로 그 땅은 “야훼께서 너희 선조들에게 주시마고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애13,5) 이라 언급될 만큼 비옥한 초생 달 지대에 위치한 관계로,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도는 민족들이 눈독을 들였다. 더구나 그 땅은 4대문명의 발상지 중 두 곳, 나일강 문명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문명을 잇는 길목이라, 남서쪽과 동북쪽에 자리 잡은 이들.
두 문명권의 변동으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그때마다 땅의 경계와 주인이 바뀌었으므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성서에 일관되게 나타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사실 고대문서에 나오는 ‘가나안’ 이라는 이름이 민족을 나타내는지, 땅덩어리만 나타내는지는 그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지역을 나타낸다 했을 때, 그 범위는 보통 아마르나 시대(기원전 1400-1350년) 때의 영토인 팔레스티나와 남부 시리아 지방을 가리킨다.
더 좁게는 내륙지방은 제쳐 놓은 채 해안지방만을 기리키기도 한다. “가나안 지방의 경계선은 시돈에서 시작하여 그랄 쪽으로 내려 가다가 가자에 이르고, 거기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 쪽으로 라사에 이르렀다”(창세 10,19). 가나안들이 믿고 있는 종교는 다신교였다. 외국에서 유래된 신을 제외하고는 하늘, 땅, 폭풍 등의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존재들을 신으로 믿었다.
이들의 종교관념은 이스라엘에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다른 편으로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최고신인 엘(EL)과 관련된 장소와 사건은 야훼 하느님이 일으키시는 것으로 해석되어 이스라엘 신앙 안에 융합되기도 했지만, 많은 수확을 일으키려는 생각으로 신전창녀와 성관계를 공개적으로 갖던 풍산제의는 이스라엘에 부정적인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쳐 후대의 예언자들에 의해서 적극 배척되었다.
<성경의 민족들>
2) 산악지대에 사는 아모리족(?)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이(東夷)라 불렀다. 동쪽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자주 쓰이는 ‘중동(MIDDLE EAST)' 이라는 말 역시 유럽이나 미국에서 볼 때 서남아시아 일대가 동쪽 중간 정도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듯 한 나라를 그 나라가 위치한 방향으로 나타내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다.
수메르 문헌에 ‘마르투(MAR. TU)' 로 나타나는 아모리인들 역시 아카드 문헌에 서쪽 방향을 뜻하는 ’아무루(amurru)' 로 언급된다. 이들이 언제 어디서부터 시원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원전 3000년대에는 유프라테스강 상류 유역에 넓게 퍼져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기원전 3000년대 후반에 유프라테스강 중하류에서 패권을 잡았던 아카드 제국(기원전 2360-2180) 과 우르3왕조(대략 2060-1950)에서 볼 때는 서쪽 방향에 위치해 있어, 이들을 ‘아무루(서쪽)’ 란 이름으로 통칭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모리인들은 농경과 유목생활을 병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에 거주하였던 이들은 가축을 사육하는 등 정책생활의 면모를 주로 보이는 반면에, 유프라테스강 중상류에 살던 이들은 중류에 건설된 제국의 국경을 넘나들며 한편으로는 물물거래를 하고 다른 편으로는 약탈을 하며 유목생활을 해나갔던 것으로 나타난다. 아모리인들은 일자리를 찾아 메소포타미아로 계속 밀려들었다. 이들의 압력은 기원전 2000년 무렵, 다시 말해서 우르 3왕조의 통치 후반에 고조되었던 듯 싶다.
이들의 약탈에 시달리다 못해 280km에 달하는 방벽을 쌓았던 것을 보면, 그러다 우르 3왕조가 무너지자 아모리인들은 이 일대에 대거 이주해 왔고, 이에 따라 주민들 안에서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아모리인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도시국가의 왕들은 다투어 ‘아무르의 아버지’ 나 ‘아무르의 왕’ 이란 칭호를 붙이기 시작하였고, 힘의 공백을 틈타 기회를 잘 잡은 아모리인들 중에는 라르사, 바빌론, 마라드, 키쉬, 마리 등지에서 도시국가의 왕으로 올라서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모리인들은 아카드인들의 문화에 점차로 동화되면서 그들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어 버렸다.
이후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마리와 아시리아, 남부 지역에서는 이신과 라르사와 바빌론이 득세하면서, 패권을 장악하려는 싸움이 뒤엉켜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민족 이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이때 아브라함 일가도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창세 11,31) 가나안으로 이주해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5세기 말 시리아 남부에 ‘아무루’ 왕국이 세워지는데, 이 왕국은 위치상 지중해와 오론테스강으로 에워싸인 산악지대에 고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도시화되고 농경문화를 꽃피운 주변 왕국과 단절되어 있고 주민들도 별로 없는 관계로 산에서 양을 키우는 방목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활하는 모습이 유목민 ‘아무루’ 와 비슷하여 이 이름을 따서 왕국 명칭으로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왕국의 남쪽 경계선은 여호수아서에 비교적 정확하게 짚어진다. “아모리인과 접경한 아베카에 이르는 가나안 사람들의 전 지역”(여호 13,4)이 가나안 정복 전쟁 때 미처 점령하지 못한 곳으로 나열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을 제외하고는 성서에 언급된 아모리인에 관련된 내용은 정확하지 않다.
약 속의 땅 점령에 앞서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무찔러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이야기(민수 21,21-35)는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실제 사실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아무르 왕국의 국경이 요르단 강 건너편에 이르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스라엘이 약 속의 땅을 점령해 들어올 무렵 아무루 왕국은 사라지고 없었다. 따라서 성경에는 기록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아모리족에 대해 대부분 설명 없이 나열되어 있거나, 극히 막연하고 일반적으로 언급하면서 가나안 정복 전쟁 때 이스라엘이 몰아냈다는 식의 이야기만 반복해서 나올 뿐이다. 이는 이스라엘 선조들에 의해 이들이 멸망당해, 성서를 기록할 시점에는 그 이름만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성경의 민족들>
산악지대에 사는 아모리족20120918성경자료실
함무라비 법전비
바빌론1왕조, B.C. 1750년경,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아모리족은 기원전 2000년부터 팔레스티나를 지배해왔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처음 부딪혔던 민족이 아모리족이다. 여호수아는 죽을 때까지 이들과 싸웠다. 여호수아기 10장에는 그가 제거한 다섯 부족의 명단이 있다.(여호 10.3)
이들은 난폭한 유목민이었으며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수메르 집단을 몰락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시리아 지역을 장악했으며, 팔레스티나까지 세력권에 넣었다. 특이한 것은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지 않은 점이다. 독립 부족이 개별 왕국을 이루었고 왕국끼리 연합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최고 문명이었던 수메르 문화를 급속히 흡수해 오리엔트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바빌로니아의 왕들은 거의 모두 아모리족의 후예였다.
구약성경에는 아모리족이 키가 크고 장대한 민족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에드레이 전투에서 아모리 출신 '바산 임금 옥'을 물리치고 그의 성읍을 빼앗는다. 에드레이는 갈릴레아 동쪽의 평야지대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옥의 침대는 길이가 아홉, 암마 폭은 네 암마였다.(신명 3.11) 암마는 길이를 나타내는 히브리말로 희랍어 큐빗과 같다. 즉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다. 9암마는 대략 4m, 4암마는 2m다. 왕의 침대라지만 엄청난 크기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아무튼 여호수아는 에드레이 지역을 므나쎄 지파에게 주었다.(여호 13.31)
고대 바빌론 왕국은 기원전 2000년경 아모리족의 한 지류가 세웠다. 여섯 번째 임금이 유명한 함무라비 왕이다. 그는 법전을 편찬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했으며 수도 바빌론을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지역의 정치 상업 중심도시가 되도록 했다.
오늘날 아모리족은 셈족으로 분류된다. 셈족이란 명칭은 노아의 아들 샘에서 따왔다. 하지만 셈의 후손이란 말은 아니다. 학자들이 종족 이름을 만들 때 노아의 아들 셈에서 차용했을 뿐이다. 아카드인과 아모리족 그리고 아말렉족, 아람인, 히브리인은 모두 셈족에 속한다.
아모리족과 아밀렉족은 다른 민족이다. 아말렉은 가나안 남쪽에 살던 작은 부족으로 이스라엘과 적개관계에 있었다. 판관시대에는 잠시 이스라엘을 지배했지만(판관 3.14) 왕정이 도입되자 사울은 아말렉 토벌작전에 나서 그들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이집트 쪽으로 몰아냈다.(1사무 15장)
<신은근 바오로 신부>
<성경의 민족들>
3) 바다에서 온 불레셋족 20120920 성경자료실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티나 해방 기구(PLO) 사이에 평화협정이 작년에 체결되었으나 구체적인 합의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둘 사이의 분쟁지역으로 대중매체에 오르내리던 가자 지구는 기원전 12세기경 불레셋인들이 자리잡았던 다섯 도시 중의 하나이다. “불레셋 사람들의 다섯 추장은 가자, 아스돗, 아스클론, 갓, 에크론의 추장들이다”(여호 13,3). 해양민족으로 알려진 불레셋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성서에서는 그리스 밑에 위치한 갑돌(크레테) 섬에서 유래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것이 나라면, 불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 내 온것도 내가 아니겠느냐?”(아모 9,7).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유래하지 않았듯이 불레셋도 마찬가지다. 다만 불레셋과 갑돌이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원전 2000년대 후반에 지중해 연안과 유럽 남동부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민족 이동이 있었다.
‘바닷백성들(Sea Peoples)'로 불리웠던 이들 무리는 에게해 동부 지역을 비롯하여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었다. 그러다 이집트의 라므세스 3세에 의해 격퇴된 후 일부는 다시 바다를 건너가 크레타, 시실리, 사르디니아로 향했고, 일부는 가나안의 해안지방에 정착하여 다섯 도시국가로 이루어진 불레셋을 세웠다. 이후 불레셋은 기원전 11-12세기에 영토 팽창 정책을 펼쳤다. 바다에서는 가나안의 시돈, 띠로, 비블로스와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다투었고, 내륙에서는 이스라엘의 12지파 연합체와 크고 작은 싸움을 끊임없이 벌였다. “불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때”(판관 14,4)에 삼손이 등장해 눈부신 활약성을 보이기도 했지만(판관 13-16장), 잇따른 패전으로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었던 ‘야훼의 계약궤’를 빼앗기는 불운을 맞기도 하였다(1사무 4,1-11).
2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영도 아래 단합하여 미스바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둠으로써, 불레셋에게 위축된 이스라엘의 사기를 드높일 수 있었다(1사무 7,2-17). 하지만 길보아 싸움에서 이스라엘군이 대패하고 사울 부자가 전사함에 따라, 북부와 중부 이스라엘이 완전히 불레셋의 세력권에 떨어지게 되었다(1사무 31장). 그러나 다윗이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모셨다는 말을 듣고 불레셋이 다윗을 잡으려고”(2사무 5,17) 여러 차례 쳐 올라 왔지만 연전연패한 이래로, 불레셋은 더 이상 이스라엘에 위협을 주는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솔로몬은 이집트와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끼인 불레셋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분열왕국 시대에 불레셋은 북이스라엘의 왕위 쟁탈전에 말려들기도 하고(1열왕 15,27; 16,15), 남유대 왕국에 조공을 바치기도 하면서(2역대 17,11) 눌러 지냈다.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가 발흥하고 나서야 불레셋과 이스라엘은 그동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였다. 공동의 적 아시리아에 맞서기 위해 손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들 군소 국가들은 대제국 아시리아의 말발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후 불레셋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패권을 강대국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아시리아에 이어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샤, 그리스의 지배를 받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듯 불레셋은 이스라엘과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데, 그들이 믿는 신은 도시국가마다 달랐다. 가자와 아스돗에서는 다곤을(판관 16,21-23; 1사무5장), 에크론에서는 바알즈붑을(2열왕 1,2), 벳산에서는 아스다롯을(1사무 31,9-10)섬겼다. 여기서 행해지는 점과 신탁은 잘 알려져서 이스라엘의 완 아하즈가 병세를 문의하러 사람을 보낼 정도였다(2열왕 1,2).
또 불레셋에서는 철기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지만(1사무 13,19-20), 고유의 독창적인 문화를 살리지 못하고 가나안 문화에 점차 동화되어 버렸다. 고유의 말도 잃어버린 채 가나안의 한 방언으로 보이는 아스돗 말(느헤 13,23-24)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레셋인들은 땅이라는 뜻의 팔레스티나(Palestina)란 이름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이는 불레셋이 위세를 떨쳐서가 아니라, 로마인들이 유대 독립전쟁(기원후 132-135)에 승리한 후 유대인들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불레셋의 이름을 따 가나안 땅에 붙여 주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민족들>20120922성경자료실
4) 오랜 역사를 지닌 이집트
4대문명의 발생지는 모두 강을 끼고 있다. 물을 얻기 쉬울 뿐 아니라, 정기적인 범란으로 강 하류에 비옥한 충적토가 조성되는 관계로 사람들이 무리지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또한 나일강이 만들어낸 지중해변의 비옥한 삼각주를 기반으로 일찍부터 문명의 꽃을 피웠으므로 그 역사가 장구하다. 기원전 3000년경에 첫 왕조가 시작된 이래로 기원전 4세기 중반에 페르샤의 지배를 받기까지 30왕조가 멸망했다. 이집트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구분된다.
상이집트는 비옥한 삼각주로 이루어진 평야지대인 반면에, 하이집트는 좁다란 계곡이 깊게 패여 있는 구름지대이다. 이렇듯 지형상의 현저한 차이로 서로 독립적으로 생활해 오던 상.하 이집트를 통일시켜 멤피스를 수도로 제1왕조가 들어섬으로써, 이집트의 국력은 더욱 강대해질 수 있었다. 그후 이집트는 비옥한 삼각주에서 생산되는 풍족한 생산물에다가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고왕국(3-6왕조) 시절에 전성기를 맞았다.
강력하게 확립된 중앙집권체제 하에서 파라오는 신격화 되었고, 그런 믿음이 온 백성을 통원해 왕의 무덤을 거대한 피라밋으로 건설하게끔 하였다. 현 세상에서 백성들을 다스렸듯이 죽은 후에도 신이 되어 저승세계를 다스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과도한 국력 소모로 중앙 정부의 힘이 점차 약해져 지방 귀족들이 득세하게 된 다음부터는 파라오가 불사불멸할 것으로 믿던 믿음도 약해졌다.
그에 따라 기원전 22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걸친 제1중간기(7-10왕조)에는 거대한 피라밋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지방 귀족들의 패권 싸움에서 도시국가 테베가 승리를 거두어 이집트를 재통일함으로써 중왕국(11-12왕조) 시대를 열었다. 12왕조는 대규모의 관계 사업을 벌이는가 하면,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경제적으로 좌우하기도 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는 소명을 받고 팔레스티나에 와 유랑하던 아브라함시대가 이 무렵이다.
아브라함이 흉년을 맞아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내려갔듯(창세 12,10), 이 시기 유목민들도 상거래를 하기위해 이집트를 오갔다. 중왕국이 와해되면서 시작된 제2중간기(13-17왕조)는 기원전 18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에 걸쳐 있는데, 이 시기에 힉소스족이 대거 침입하여, 이집트인들을 하이집트로 몰아내고 상이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이때에는 외래 민족이 통치하던 시절이라 능력만 있으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높이 등용될 수 있었다.
“너만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나의 온 왕궁을 네 수하에 두겠다”(창세 41,39-40)며 선뜻 요셉에게 총리대신 자리를 맡길 수 있었던 것(창세 41,1-45)은 힉소스족이 이집트를 다스리던 시기(기원전 1720-1570년)라 가능했을 것이다. 힉소스족을 물리친 후에 신왕국(18-29왕조)이 시작되었다. 약 150년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체험은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각성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투트모세 3세는 17번이나 전쟁을 벌여 시리아 북방까지 영토를 늘렸다. 이들 정복지에서 들어오는 풍요로운 부로 말미암아, 이집트인들음 아마르나 시대(기원전1375-1300년)에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군사력 방면에 힘을 기울이지 않은 관계로 팔레스티나의 군주들이 제국에서 이탈해 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새로 들어선 19왕조는 내륙에 있는 테베보다는 삼각주 부근의 라므세스(출애 1,11)에 주로 머물면서, 북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을 강제노동으로 내어 몬 “요셉의 사적을 모르는 왕”(출애 1,8)은 팔레스티나 정벌을 자주 나갔던 19왕조의 세티 1세나 라므세스 2세였을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빠져나온 후 “불레셋 땅으로 가는 길”(출애 13,17)로 접어들지 않은 것은 이집트인들이 취한 북방정책으로 국경수비대가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리비아인들을 포함한 ‘바다 백성들’의 침입이 있었지만, 라므세스 3세를 비롯한 역대 파라오들은 그들을 내어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팔레스티나에서 완전히 내어 몰 수는 없어 그들 중의 일부가 불레셋을 세웠다(바다에서 온 불레셋족 참조). 이집트는 라므세스 3세가 죽고 나서는 팔레스티나 지역을 모두 잃어버리고 이집트 영토 안으로 움추러 들었다. 신 왕국이 막을 내린 다음부터 이집트는 예전의 세력권을 다시 회복할 수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하나로 융화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외부적으로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마케도니아 등의 강대국이 북방에서 위세를 떨쳤기 때문이다. 다만 이스라엘과 유대를 비롯한 팔레스티나의 군소 국가를 부추겨 북방에서 발원한 대제국들과 맞서 싸우게 했을 뿐이다.
아시리아 시종장관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며 히즈키아 왕에게 전하라고 했던 “네가 믿는 이집트는 부러진 갈대에 불과하다. 그것을 지팡이처럼 믿는다마는 그것을 잡았다가는 도리어 손만 베일뿐이다. 이집트 왕 파라오는 자기를 믿는 모든 자들을 그렇게 대한다”(2열왕 18,21)는 말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본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했던 유대 왕들은 이집트를 믿고 북방세력에 눌리던 이집트는 급기야 기원전 671년에 아시리아 왕 에살하똔의 침입을 받아 삼각주 지방을 속주로 빼앗기고 말았다.
아시리아가 약해지자 옛 세력권을 탈환하고자 출정한 이집트 왕 느고는 유대 왕 요시아만 꺾었을 뿐(2열왕 23,29), 기원전 605년 가르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게 참패를 당했다. 이후 이집트는 신흥 강대국 페르샤와 마케도니아 손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되었지만, 악티움 해전에서 패한 후 로마의 속국으로 전략하고 말았다.
<성경의 민족들>
5) 떠돌며 사는 아람족 20120924성경자료실
이스라엘은 햇곡식을 바치며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 이었습니다.”(신명 26,5)고 하느님께 아뢴다. 그만큼 이스라엘과 아람은 성경 안에서 가까운 관계로 제시된다. 아브라함은 아람의 큰할아버지다(창세 22,20-21). 또한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 야곱이 아내로 맞은 레아, 라헬은 모두 아람 사람이다(창세 25,20; 29,15-30).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성조들이 생활하던 시대에, 아람은 종족으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23세기경의 아카드 문헌에 ‘아람’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종족이 아니라 단지 장소로서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 1세(기원전 1116-1076년)의 비문에서야 종족으로서의 아람이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아흘라메 아르마야’ 가 아람인만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아모리인과 비슷한 시대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아람인이 분명한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기원전 2000년대 말과 1000년대 초에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라를 세우고 나서이다. 이후 소바 아람과 다마스커스 아람 등 시리아 지역에 세워진 나라들과 베데덴(아모 1,5), 빗-자마니(수도 고잔, 2열왕 17,6) 등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세워진 나라들은 신흥 아시리아의 세력을 북쪽과 서쪽에서 각각 견제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런데 시리아 지역에 아람 국가들이 세워지던 기원전 11세기 무렵은 이스라엘이 사울 왕을 중심으로 한층 강력한 집권체제에 들어가던 때였다. 따라서 두 신흥국가들은 사사건건 부디 칠 수밖에 없었다.
“사울은 모압, 암몬 백성, 에돔, 소바 왕,불레셋 등 사방에 있는 원수들과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어 이스라엘 왕위를 굳혔다”(1사무 14,47). 사울과 맞서 싸운 나라로 제시되는 소바 아람은 르흡의 아들 소바 왕 하다데젤 시절에 전성기를 맞았다. 다마스커스 아람 및 마아가 왕국을 속국으로 삼아 북서쪽으로 하맛 왕국과 접경하고(2사무 8,9-10참조), 남쪽으로는 암몬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제국을 건설하고 유프라테스강에까지 손길을 미쳤다.
그러나 다윗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후(2사무 10,6.16; 8,6)부터는 그 기세가 꺾이었다. 이후 소바 아람은 역사의 무대에서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시리아가 등장하게 되었다(1열왕 11,23-25). 시리아는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상황에 힘입어 급성장하였다. 서로 맞붙어 싸우며 대치하고 있던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상대방 나라를 고립시키기 위해 시리아에 예물을 보내어 자기편으로 삼고자 하였다.
유다 왕 “아사는 야훼의 전과 왕실창고에 남아 있던 은과 금을 모조리 거두어서 사신을 시켜 시리아 왕에게 예물로 보내며 청을 넣었다. 당시 시리아는 헤지온의 손자이고 타브림몬의 아들인 벤하닷 왕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정하고 있었다..... ‘부디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맺으신 동맹을 파기하시고 바아사로 하여금 우리 영토에서 물러가게 해주십시오.’“(1열왕 15,18.19). 이스라엘 왕국 북쪽에서 세력을 늘려가고 있던 시리아는 벤하닷 2세 때 이스라엘을 여러 차례 침공해 왔지만,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던 아합 왕에게 번번이 꺾이고 말았다(1열왕 20,26-34).
이렇듯 서로 접경하고 있는 관계로 계속적으로 싸움을 벌였던 이들 두 왕국이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은 아시리아 왕 살마네셀 3세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체해야 할 절박한 현실에 부닥치고 나서이다. 그러나 그것도 하자엘이 벤하닷을 죽이고 시리아 왕으로 즉위하고부터는(2열왕 8,28-29; 13,22년) 동맹관계가 깨져 다시 끊임없는 접전에 휘말리게 되었다(2열왕 8,28-29; 13,22). 이 싸움으로 시리아가 아시리아 방면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게 되자, 아시리아는 그 틈을 타 메소포타미아 북방에서 아시리아를 견제하던 아람 국가들을 쳐부수는데 힘을 다 쏟을 수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람 국가들은 차츰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기원전 855년에 가장 완강하게 버티던 비타디니 왕국마저 망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시리아는 완충지대 없이 아시리아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고, 갈수록 거세지는 압력을 견디다 못해 살마네셀 3세(기원전 858-824년)와 아닷 니나리 3세년(기원전 810-783) 때에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디글랏빌레셀 3세(기원전744-727년) 시절에는 아시리아의 한 지방으로 전략하고 말았다. “이제 다마스커스는 도시의 모습을 잃어 돌무더기가 되고 말리라.... 시리아의 남은자도 사라지리라”(이사 17,1.3)는 예언 말씀대로였다.
시리아 사람들이 섬기는 대표적인 신은 폭풍의 신 하닷이었다. 아합과 맞서 싸운 벤하닷은 하닷신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왕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들 아람인들의 예배양식이 이스라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약소국인 유다 왕국이 야훼 신앙만을 끗끗이 지켜나가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유다 왕 아하즈는 아시리아 왕 디글랏빌레셀 3세가 시리아 왕 르신을 꺾고 다마스커스에 달려가서 그곳의 제단 모양을 본떠다가 예배를 드렸고, 급기야는 아들을 불에 살라 바치기도 하였다(2열왕 16,1-14).
그보다도 페니키아인들의 알파벳을 본 따 배우기 쉽게 만들어진 아람인들의 언어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고대 근동 국가들의 언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아람인들이 세운 나라가 특별히 강대해서가 아니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유목민이던 아람인들이 각 나라에 자리 잡으면서 아람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예수시대에도 아람어를 일상 언어로 사용하였던 까닭에 “압바”, “마라나타”, “탈리다 쿰”,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등의 아람어가 성경에 때때로 언급된다.
<아람족>
이스라엘 백성은 수확 후 햇곡식을 바칠 때 신앙고백을 함께 했다. 신명기에는 모범 기도문이 남아 있는데 아람인의 후손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는데 이집트로 내려가 크고 강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인들이 학대하고 괴롭혔습니다. 저희가 조상들의 하느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기적으로 끌어내주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습니다.이제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저희가 바칩니다."(신명 26.5-10)
이렇듯 가나안 정착 초기의 이스라엘은 아람인과 구분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같은 혈통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며느리로 아람 여자인 레베카를 선택했다.(창세 25.20). 그리고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 역시 아람출신의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했고 이들의 자녀가 이스라엘 12지파의 시조다. 이처럼 아람인은 히브리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 무렵의 이스라엘은 민족적 특성이 없었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고 양떼를 따라 다니는 유목민이었다. 땅도 집도 없었고 보장된 내일의 삶도 없었다. 평범했던 이들이 민족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통해서다. 동족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들을 뭉치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출애굽 사건 이후라 할 수 있다.
이후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고 아람인과도 완전히 구별되었다. 그러면서 두 민족은 사이가 벌어졌고 서로 이방인 취급을 하였다.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며, 수없이 싸우기도 했다.(1열왕 20장) 이들의 중심지는 다마스쿠스였고, 오늘날의 시리아는 이들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다. 문둥병에 걸렸다가 예언자 엘리사를 만나 완쾌된 '나아만' 장군은 아람국의 군인이었다.(2열왕 5.1-19)
아람족 역시 유목민이었으면, 기원전 14세기에 메소포타미아 북부와 시리아에 정착했다. 이들은 이집트와 히타이트 그리고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지점에 있었기에 오리엔트 무역을 좌우하는 상업도시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다마스쿠스다. 훗날 아람어는 상인들을 통해 인접국가로 퍼져 나갔고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는 외교용어로 사용했다. 그러다 알렉산드로스가 등장하면서 그리스어가 세계 공용어가 된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
<성경의 민족들>20120926성경자료실
6)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바빌로니아
바빌로니아는 현재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페르샤만에 이르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하류 유역에서 기원전 19세기경에 아카드족과 아모리족과 수메르족을 기반으로 발원되었다. 수메르족이 세운 우르 제3왕조가 무너진 이후 메소포타미아 유역에는 도시국가들이 이후 죽순격으로 마구 생겨났는데, 후에 바빌로니아 제국의 모태가 된 도시국가 바빌론도 그렇게 세워졌다. 이를 기점으로 영토를 더욱 확충시킨 이는 여섯 번째로 왕위에 오른 아모리족 혈통을 이어 받은 함무라비 대제이다.
그는 서로 패권을 다투는 도시국가 라르사에 이어 이신을 점령하는 등 세력을 크게 떨치던 엘람족을 꺾고, 마리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므로써 수메르와 아카드 지역을 포괄하는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 국력을 바탕으로 그는 고대 근동에서 통용되어 오던 법전을 집대성해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해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바빌로니아 제국은 아시리아도 점령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 이후로 왕위에 오른 이들은 역량이 함무라비만 못하였다.
그래서 여러 민족의 침입을 받고 흔들리다가는 마침내 캇사이트족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기원전 12세기경에 토착민들이 이방민족을 몰아내고 이신 제2왕조(기원전 1157-1025)를 열면서 바빌로니아는 다시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지만, 느부갓네살 1세 때 잠깐 빤짝하고는 한참 기세를 떨치던 아시리아에 눌려 지내야만 했다.
더군다나 시리아 사막에서부터 밀려 내려오는 아람족의 대대적인 약탈을 막아내느라 국력을 헛되이 소모해 좀처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주도권을 집을 수가 없었다. 다만 아시리아가 약해졌다 싶으면 곧 바로 독립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므로닥 발라단이다. 그는 사르곤 2세가 북방의 우라르트 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바빌론에서 내어쫓기게 되자, 유다 왕 히즈키야를 문병하는 사절단을 보내는 등 외교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 무렵 바빌론의 왕 발라단의 아들 무로닥 발라단이 히즈키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절단을 보내어 편지와 예물을 전하였다”(2열왕 20,12). 아마도 므로닥 발라단은 이 편지에서 아시리아에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제안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아시리아는 변경에 위치한 유다와 제휴하고, 다른 편으로는 엘람에 많은 예물을 갖다 바치고 지원을 약속받았던 므로닥 발라단은 사르곤 2세에서 산헤립으로 왕위가 계승되는 기회를 틈타 봉기했지만, 독립하기는커녕 산헤립의 즉각적인 침공을 불러일으켜 바빌론 신전이 파괴되고 마르둑 신상도 빼앗기는 결과만 낳았다.
산헤립을 이어 왕위에 오른 에살하똔이 바빌론 주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벌인 각종 사업으로,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사이에 한동안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그 아들 대(代)인 아수르바니팔 시절에 다시 봉기했고, 그가 죽고 나서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갈대아의 나보폴라살은 바빌로니아의 왕이 된 후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메대와 외교협상을 벌여 시리아와 남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하기로 약속하고는, 메대와 함께 기원전 612년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점령하였다. 이어 기원전 605년에 가르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 군대의 도움을 받아 재기하려는 아시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한동안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쥐고 흔들던 아시리아 제국을 결정적으로 멸망시켰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느부갓네살 2세는 이집트의 사주를 받아 반기를 든 유다 왕국을 몇 차례 침공하였다. 기원전 597년 침공 때에 “유다 왕 여호야긴은 자기 어머니와 신하들과 장군들과 내시들을 거느리고 바빌론 왕에게로 나아가 사로잡혔다”(2열왕 24,12). 이때에 이아야 예언자가 일찍이 히즈키야에게 예언한대로 야훼의 전과 왕국에 있는 모든 보화를 털렸다(이사 39,6; 2열왕 20,17; 24,13).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전 시민과 고관들과 군인 일만 명, 그리고 은장이들과 대장장이들”(2열왕 24,14)이 바빌론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것이 제1차 바빌론 유배다.
여호야긴 대신에 왕위에 오른 시드키야도 반란을 일으켰지만, 기원전 586년에 바빌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라가 망하는 비운을 초래하였을 뿐이다. 이때에 야훼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성 안 건물이 모두 불탔고, “예루살렘성에 남은 사람들과 바빌론 왕에게 항복해 온 자, 그리고 기타 남은 백성들”(2열왕 24,11)이 포로로 끌려가는 제2차 바빌론 유배가 있었다. 이렇게 남유다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아시리아 제국의 뒤를 이어 시리아와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석권하였던 바빌로니아의 권세도 얼마 가지 못했다.
느브갓네살 이후 정권이 몇 차례 뒤바뀌다가 기원전 539년에 페르샤의 고레스에게 무릎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바빌로니아 종교는 다신교이다. 각 도시국가마다 모시는 신이 따로 있었는데, 이 도시국가들이 한데 통합되어 제국을 이루게 됨에 따라 각 도시국가들이 모시는 신들의 위계질서가 생겼다. 이 위계질서는 어느 도시국가가 세력이 있느냐에 따라서 새롭게 정립되었다. 예컨대, 도시국가 바빌론이 힘을 떨치자 그 도시국가의 신인 마르둑(히브리어 므로닥)이 그동안 최고신으로 여겨지던 아누와 엔릴을 제치고 올라섰다.
그러다 바빌론 부근의 보르시빠 도시가 득세하자 마르둑(=벨)과 함께 그 도시의 신인 나부신이 함께 숭앙받았다. 따라서 제2이사야 예언자는 “벨신이 엎드러진다. 느보신이 거꾸로 진다”(이사 46,1)는 말로 바빌로니아가 멸망하리라고 예언하며, 바빌론에 유배된 이스라엘에게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하였다.
그 희망대로 이스라엘은 페르샤가 바빌론을 함락한 후, 팔레스티나로 돌아가도 좋다는 고레스의 칙령을 들을 수 있었다.
“페르샤 황제 고레스의 칙령이다. 하늘을 내신 하느님 야훼께서는 세상 모든 나라를 나에게 맡기셨다. 그리고 유다 나라 예루살렘에 당신의 성전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지워 주셨다. 그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 가운데 있는 당신의 모든 백성과 함께 하시기를 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돌아가라”(2역대 36,22-23).
<성경의 민족들>20120928성경자료실
7) 신비에 싸인 헷족
헷족은 아직도 안개 속에 있는 민족이다. 그들의 기원이나 인종의 특성은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기원전 23-20세기에 언어상으로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무리들이 소아시아 지방(현재 터키)에 이주해 와, 헷 원주민들이 세운 도시국가를 점령하고 헷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 역사를 이어갔음은 확실하다.
헷(=하티, 힛타이트) 왕국의 기록은 하투실 리가 다스리던 기원전 17세기 초부터 나타나는데, 아마도 이때쯤 시리아 지역의 서기관 학교에서 사용하던 점토판 기록방법을 차용해 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기록에 따르면 하투실리는 시리아가 위치해 있는 남동쪽 방면으로 손길을 뻗쳤고, 하투실리의 손자인 무르실리 왕 때에 시리아에 있는 도시국가 알렙포를 점령하고, 고바빌로니아 제국을 공격하여 함무라비 이후 5번째 왕인 삼수디타나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무르실리는 소아시아에서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지만, 수도로 돌아와서 얼마 되지 않아 의형제로부터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아야 했다. 그 이후로 헷 왕국은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정국이 불안정한 틈을 타 습격해 온 주변국가에 대응해야 했고 때마침 기근이 겹치기도 해서 영토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기원전 14세기 무렵에 헷 왕국은 시리아에서의 주도권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투드할리야와 아르누완다 왕조 시절에 알렙포를 다시 점령할 수 있었고, 당시 시리아 북동부에서 팽창일로에 있던 미탄니 왕국을 무찌르고 나서는 헷 왕국의 전통적인 봉신제도를 도입해서 시리아 일대를 영토로 편입시켰다.
헷 왕국이 알렙포의 남쪽에 위치한 카데스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하자, 당시 시리아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러 북진정책을 편 이집트 왕 라므세스 2세와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노동을 시켜 곡식을 저장해 둘 도성 비돔과 라므세스를” 고센 지역에 세우는 등 건축사업과 영토 확장 정책을 활발하게 편 그는, 기원전 1300년경 4개 군단을 이끌고 헷 왕국과 전투를 벌였지만, 어느 편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두 나라는 시리아를 접경지대로 지리하게 군사적으로 대치하다가, 기원전 1284년에 다마스커스를 국경선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이후 왕국의 역사는 분명치 않다. 동쪽에서는 아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세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아르자와 왕국의 견제를 받다가, 기원전 1190년경 바닷사람(해양민족)의 출현 등 중근동의 대대적인 민족이동 속에 헷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헷 왕국이 다스리던 영토는 작은 왕국들과 도시국가들로 나누어져 독립적으로 자기 앞길을 개척해 나가려 했지만, 군사대국이었던 아시리아에 하나씩 먹혀 들어가다가, 기원전 717년에 가르그미스가 아시리아 왕 사르곤 2세에 점령됨으로써 소왕국으로서 누리던 주권을 모두 빼앗겼다. 이처럼 헷 왕국은 그 영토가 팔레스티나에까지 미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대제국으로서 누리던 영광도 이스라엘이 통일왕국을 세우기 훨씬 이전인 기원전 1200년에 끝났기 때문에, 팔레스티나를 주 무대로 역사를 이어왔던 이스라엘과는 직접 맞닥뜨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성경은 헷족이 가나안족 다음으로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아브라함은 헷 사람에게 아내 사라를 묻을 동굴을 팔라고 간청하는가 하면(창세 23,1-20), 약 속의 땅 가나안을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출애 3,8)으로 묘사한다. 더군다나 솔로몬은 이집트에서 말을 사서 헷 왕들에게 되파는 중개무역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2역대 1,17), 시리아군에 의해서 사마리아에 갇힌 이스라엘의 동맹군으로 헷 왕이 언급되기도 한다(2열왕 7,6).
아마도 이들은 헷 제국이 멸망한 후에 소왕국으로 쪼개지는 과정에서 시리아를 거쳐 팔레스티나에 흘러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아시리아는 시리아를 가리켜 ‘헷족의 땅’ 이라고 일컬었다. 헷족과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영향 관계는 분명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둘의 풍습과 문화는 흡사한 면을 일부 보인다. 사울은 불렛셋과의 싸움을 앞두고 꿈이나 우림이나 예언자들에게서 아무 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자 무당에게 사무엘의 혼령을 불러달라고 청한다(1사무 28,3-14).
이는 땅에 움푹 페인 곳을 지하세계의 혼령과 접촉할 수 있는 장소로 여겨, 거기에서 예식을 드리는 가운데 신탁을 받았던 헷족의 풍습과 유사하다. 또한 이스라엘과 헷족은 사제뿐만 아니라 왕에게 기름을 부었고, 그 행위에 대관식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담았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 외에도 공적으로 모욕을 줄 때 신을 벗긴다든가(신명25,5-10;룻기 4,7-8), 똑같은 제의 봉사자이면서도 사제와 레위인 사이에 차 등을 두었다는 점에서도 다를 바 없다. 특히 계약을 맺는 방식의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계약조문을 열거하기에 앞서 계약의 주도권 자를 명시하고 계약 쌍방 간의 이전 관계를 밝히는 역사적 서문이 들어간다는 점이나. 계약 조문 뒤에 계약조문을 정기적으로 낭독하면서 계약의 준수 여부에 따라 축복과 저주를 내린다는 점에서 양자는 자주 비교되고 있다(출애 20,2-3; 24,3-8; 신명 28장).
<성경의 민족들>20120930성경자료실
8) 팔레스티나는 후리족의 땅?
후리족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해에 있는 코카서스 남부 및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기원되었다. 아람족에 앞서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살았던 그들의 역사는 기원전 1550넌을 분기점으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 이전에는 고향 땅을 떠나 남. 서쪽방면에 위치한 고대 근동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오는데 그치지만, 그 지역에서 일정 세럭을 형성한 후에는 고대 근동의 국제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후리족은 우르 3왕조 시대 (기원전 2150-2000 년)와 이신 라르사가 주도권을 잡던 시대(기원전 2000-1800 년)에 여러 자료에서 그 이름이 많이 나타나지만, 기원전 18 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마리의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하나 도시의 계약문서에서 처음으로 민족으로서 언급된다. 아마 이 무렵부터 후리족은 메소포타미아 상부와 시리아 북부 지역에 많이 이주해 살면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헷 왕국의 하투실리 1세가 다스리던 시절인 기원전 1635년에는 후리족의 군대가 소아시아를 침입하였고, 헷 왕국의 무르실리 1세가 바빌론을 치기 위해서 시리아를 경유하던 기원전 1595년에는 후리족의 저항을 거세게 받아야만 했다. 이렇게 고대 근동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높여온 후리족은 급기야 기원전 15세개 초에 길리기아에서 왕권을 잡았고, 병거를 다룰 줄 아는 인도 아리안들과 함께 미탄니 왕국을 세워 상부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를 한 세기 이상 석권하고 이집트 왕과 맞먹는 권세를 누렸다.
이 왕국의 공식 언어가 후리아거 될 정도로 후리족이 큰 비증을 차지하였던 미탄니 왕국은 전차를 끄는 말들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기술을 고대 근동에 퍼뜨리는 역할을 하였다. 미탄니 왕국은 기원전 1450년 사우샤탈 왕 때에 전성기를 맞았다. 근는 시리아의 영유권을 두고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와 전쟁까지 치렀다가 패함으로써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영토를 상실했지만, 얼마 자나지 않아 조약을 맺음으로써 알렙포와 북부시리아를 다시 다스릴 수 있었다. 그 후의 미탄니 왕들은 이집트에 공주를 시집보냄으로써 양국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370년경 미탄니 왕국은 그 나라와 동맹을 밎은 길리기아를 견제하느라 정상적인 길을 피해서 유프라테스강 북쪽으로 돌아서 쳐들어 온 헷 왕국의 수필루리우마 왕에게 정복됨으로써 속국으로 전락하는 비운을 맛보았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되지 않아 아시리아의 침입을 받고는 아시리아의 영토로 편입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미탄니 왕국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후리족은 그 시시를 전후에서 시리아와 페니키아를 비롯하여 팔렛,티나에까재 퍼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집트 신왕국 이후의 문서에서 팔레스티나를 ‘후리족의 땅(후루의 땅)’ 이라 부르고 있는 것으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성서에는 ‘후리족’ 이라는 말 대신에 ‘호리족’이 언급되는데. 이 명칭은 세일산이나 에돔 지역에 거주하였던 원주민 (창세 36,20-21. 29-30)의 이름과 혼선을 빚었던 관계로, 점차 호리족의 한 지역을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히위’ 나 ‘여부스’ 로 그 이름이 대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후리족은 호리족이 사는 에돔 지역이 아니라, 히위족이 살았던 요르단강 서쪽 지역에 주로 거주했을 것으로 생각된는 증거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다.
히위족은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여호수아가 곧바로 맞닥뜨려야 했던 팔레스티나 원주민의 하나였다. 예리고와 아이 주민을 전멸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속여서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은 기브온 주민들은 바로 히위족이었다 (여호9,1-15).
‘기브온에 사는 히위족밖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우호관게를 밎은 도시가 하나도 없었다’(여호 11,19). 또한 기원전 14세기의 아마르나 문서에서 예루살렘 왕이 후리족의 모성 신을 뜻하는 ‘헤파의 종’ 이란 이름으로 제시되고 다윗이 야훼께 친교제를 드렸던 타작마당의 소유주의 이름이 후리어로 “주님” 이라는 뜻인 ‘아라우나’ 인 것을 보면 (2사무 24,15-25), 다위에게 함락되기 이전에 예루살렘에 살던 원주민 여부스 사람들 (2사무 5,6-10)도 후리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기브온 주민과 여부스 주민등 후리족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살아남아 이스라엘 후손들과 섞여 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여호 9,22-27;15,63), 아브라함이 야훼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머물러 살았던 곳이 후리족의 중심지였던 하란이었던 까닭에 (창세 11,31-12,4), 이스라엘과 후리족의 풍습은 서로 흡사한 부분이 많다. 자식없는 사람이 상속자로 삼기 위해 양자를 들이거나 (창세 15,2-3) 몸종을 소실로 들이는 (창세 16,1-3) 행위, 양자를 들인 이후에라도 본부인이 자식을 낳으면 상속권이 친아들에게로 돌아오는 것 (창세 21,8-10), 야곱이 라반에게 대하는 행동과 수호신상에 집착하는 라반의 모습 (창세 31장), 형이 자식없이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대를 잇게 하는 것(신명25,5-7) 등은 모두 후리족의 영향권에 있었던 누지 문서의 내용과 자주 비교되고 있다.
<성경의 민족들>
9) 멀고도 가까운 에돔족
사해 남단에 모여 살았던 에돔족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팔레스티나를 사이에 두고 아시리아와 이집트가 약화된 기원전 14세기경에, 베두인이나 반(半)유목민들이 유다 남쪽 변경의 광야에서 흘러 들어와 기존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거나 섞여 살면서, 기원전 13세기 초에 강력한 문명을 형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변화는 비단 에돔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훌레 호수에서 아카바만에 이르기까지 요르단강 동편 지역의 공통된 현상이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에돔. 모압. 암몬 등의 다섯 왕국이 생겨났다. ‘에돔’ 이라는 이름은 이집트 왕 메르넵나 통치 시절 (기원전 1224-1214)에 국경 요새를 지키던 관리가 띄운 보고서에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아마도 사해 남단와디 아라바의 동쪽 산악지대가 붉은사암이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에돔’은 셈족어로 붉다는 뜻이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형 에사오가 사냥에서 돌아온 후 허기져서 야곱이 끓이고 있는 붉은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다고 해서 그 이름을 에돔이라고 부르는데(창세 25,29-34), 이는 에돔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된 시기에 에돔을 그 지형과 연결시켜 풀이한 것이다.
에돔은 이스라엘에 비해서 왕권제도가 비교적 늦게 확립되었다. 다윗이 에돔을 정복하기 전까지 에돔의 통치체제가 어떠했는지는 문헌에 전혀 나와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이 12지파 공동체를 거쳐 왕정체제로 변화되었던 과정이 직 . 간접으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울이 에돔을 쳐부수고 (1사무 14,47) 에돔 출신 도엑이 사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과 에돔은 최소한 기원전 11세기 말경에는 서로 군사적으로 맞부디 칠 정도로 세력을 뗠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에돔은 위세를 떨치기도 전에 한참 전성기를 맞은 이스라엘에 눌려 지내야만 했다.
기워전 990년경 불레셋, 보압, 암몬, 아람, 아말렉과 전쟁을 치른 여세를 몰아, 이스라엘의 동남쪽 영토를 안정시키고 아카바만의 무역을 손에 넣을 목적으로 쳐들어 온 다윗에게 패해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2사무 8,13-14; 1열왕 11,15-16; 시편 60;1역대 18,12-13). 이때 요압은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에돔의 장정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는가 하면, 그 후에도 주둔군을 두어 에돔을 통제하려 하였기 때문에, 에돔의 왕자 하닷은 후일을 기약하며 이집트 망명길에 올랐다.
어린 소년이었던 하닷은 이집트에서 파라오 공주와 결혼하고 다른 파라오의 왕자들과 함께 자라날 수 있었는데, 이는 하닷을 통해 에돔을 되찾아 이집트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정략적인 차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이 황국의 기틀을 바로잡아 가자 정책을 바꾸어 이스라엘과 결혼동맹을 맺었으므로 (1열왕,2,46-3,1), 이집트의 후원 아래 독립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하닷의 계획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1열왕11,21-22).
실제로 에돔은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분열된 후에도 남유다에 반기를 들 만큼 국력을 회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이 다스릴 때까지도 독자적으로 왕을 세울 수가 없었고, 유다군의 수비대도 계속 남아 있었다(1열왕 22,48). 하지만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여호람(기원전 847-845년)이 왕위에 오르자, “에돔은 유다에 반기를 들고 저희의 왕을 세웠다” (2열왕 8,20). 이후 에돔은 독립국으로서 존속할 수 있었지만, 유다의 잦은 침략 (2열왕 14,7)에 점점 약해져 아시리아 왕 아닷니라리 3세 (기원전 802-782년)가 쳐들어왔을 때 띠로‘시돈’이스라엘‘불레셋과 함께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에돔은 유다의 아하즈 (기원전 736-729년)가 반(反)아시리아 전선에 선 시리아.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이전에 상실했던 아카바만의 항구도시 “엘랏을 탈환하여 에돔의 것으로 만들고 엘랏으로부터 유다 군을 쫓아 내였다” (2열왕 16,6). 이후 시리아가 아시리아에 망하자, 에돔은 아시리아의 봉신국이 되어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요청이 있을 때에는 군대도 빌러주었다.
아마도 이때에 다마스커스에서 에돔 지역을 잇는 도로가 중요하게 여겨져, “왕의 큰길” (민수 20.17)이란 명칭이 붙여졌을 것이다. 이 무렵에 에돔군이 유다 남부를 약탈하며 (2역대 28,17), 와디 아라바의 서련에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따라서 이집트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들어선 모세가 카데스 바르네아에 이르러 에돔 왕에게 전갈을 보내는 대목(민수 20,14-21)은 기원전 13세기경이 아니라, 아시리아의 봉신국이 되어 유다에 맞서던 시절의 에돔의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에돔은 아시리아가 망하자 잠시 동안은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지만, 기원전 605년에 느부갓네살이 위세를 떨치자 모압. 암몬. 띠로. 시돈. 유다 왕들과 더불어 바빌론에 반기를 들 계획까지 세우지만(예레 27,1-7), 막상 유다 왕국이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을 때에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기원전 587년에 유다왕국이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아 멸망할 때에도, 에돔 왕국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유다 왕국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예레 40,11).
에돔이 왕국으로서 종말을 고한 것은 기원전 552년에 나보니두스가 아라비아 북부 지방을 원정할 때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계속 그 자리에서 머물러 살다가 페르샤 시대 말기에 이 지역으로 쳐들어온 나바테야족에게 밀려나 유다 남쪽 지방에 몸 붙여 살기 시작하면서 이두메아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유다 마카베오로부터 시작된 독립전쟁 때 할례를 받고 유다인들과 어울려 살게 되었다.
예수 시대에 팔레스티나를 다스리던 헤로데 일가는 바로 이두메아 출신이라서, 유다인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에돔은 자체로 전해 내려오는 문헌이나 기록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왕의 큰길로 밀려드는 각종 문화의 영향 아래 유다인의 문물에 일찍 동화되었으므로 남다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성경의 민족들>20121003성경자료실
10) 천연요새로 둘러싸인 모압
사해 동편 지역에 자리 잡은 모압 왕국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발굴 결과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인 단절 현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외부에서 어떤 민족이 들어와서 새 왕국을 건설했다기보다는 그 지역의 유목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기원전 13세기경에 강력한 문명을 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모압의 영토는 지형적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동쪽으로는 아라비아 사막에 접경해 있고, 서쪽으로는 사해와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세레드강이 흐르고 있어서 외부 세계와 모압을 차단시켜 주는 천연요새 역할을 한다. 이에 반해 북쪽은 강이나 사막과 같이 뚜렷한 지형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외부 세력과 자주 맞부딪쳤고, 그 힘겨루기의 결과에 따라 경계선이 곧잘 바뀌었다. 하지만 사해에서 흘러나와 모압 중앙을 관통하는 아르논강이 중간 방어선 역할을 하였으므로, 웬만해서는 모압 전역이 적의 침입에 휘말리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이집트에서 빠져 나온 이스라엘이 에돔의 국경을 돌아 나오다가 진을 쳤던 곳은 바로 모압의 두 강가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레드 개울에 진을 쳤다가 또 그 곳을 떠나 아르논강 건너편에 이르러 진을 쳤다. 아르논강은 아모라인들의 지경에서 시작되어 광야를 지나 모압과 아모리 사이 모압 국경을 흐르는 강이다”(민수 21,12-13). 아르논강은 사해 가운데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강을 지난 후에는 사해 방면으로 비스듬히 가로지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당시 그 영토는 아모리 왕 시혼이 다스리고 있었다.
원래는 모압 땅이었지만, 시혼이 “전에 모압 왕을 치고 그의 영토를 아르논에 이르기까지”(민수 21,26) 빼앗았던 것이다. 덕분에 모압은 광야에서 유랑하던 이스라엘과 직접적으로 싸움을 벌이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쳐부수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발람을 불러다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청한다. 이때 성서에서 처음으로 모압 왕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그가 바로 발락이다(민수 22,2-6). 하지만 모압 왕 발락의 우려와는 달리,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진입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으므로, 아르논강을 넘어서 모압을 넘볼 여유가 없었다.
다만 아모리 왕 시혼이 다스리던 아르논강 북부인 엣 모압 영토를 르우벤 지파가 할당받아 굳게 지킬 뿐이었다(여호 13,15-21). 이후 성서에서 두 번째로 언급되는 모압 왕은 판관시대의 에글론이다. 그는 “암몬과 아말렉 백성과 합세하여 이스라엘에 쳐들어 와 종려나무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왕 에글론을 십팔 년 동안 섬기게 되었다“(판관 3,13-14).
여기서 종려나무 도시가 예리고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즈음에 모압은 이전에 아모리 왕 시혼에게 빼앗겼다가 이스라엘에게 넘어간 아르논강 북부 영토를 회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해 동편 전역을 모압이 차지하였다기보다는 그중의 일부분을 다스렸을 것이다. 이후 모압은 판관들의 시대를 지나 왕정으로 들어간 이스라엘에게 예속되기 시작하였다. “사울은 모압, 암몬 백성, 에돔, 소바 왕, 불레셋 등 사방에 있는 원수들과 싸울 때마다 승리를 거두어 이스라엘 왕위를 굳혔다”(1사무 14,47).
더구나 다윗이 다스리던 시절에 “모압은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었다”(2사무 8,2). 이런 체제는 솔로몬 치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남북 왕국으로 분단되었을 때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을 것이다. 다만 남북으로 분단된 후에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만 달라졌을 뿐이다. 이런 체제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아합 왕이 죽고나서이다(2열왕 1,1; 3,5).
모압 왕 메사는 권력 승계에 따른 누수현상과 왕위를 계승한 아하지야가 병마에 시달리는 기회에 이스라엘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하지만 아하지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람이 유다군과 에돔군을 끌어들여 쳐들어옴으로써, 이들 연합군과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패전을 거듭하였고 급기야는 키르하레셋에서 포위되기까지 하였다(2열왕 3,7-27). 하지만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긴 후에는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에게 빼앗겼던 메드바를 비롯하여 아르논강 북부 영토를 대부분 되찾을 수 있었다.
더구나 이 무렵에는 시리아가 위세를 떨칠 때이므로 이스라엘은 위축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모압은 시리아와 연줄을 대어 왕의 큰길을 이스라엘의 영향권에서 빼냈을 것이다. 이후 모압은 시리아가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을 때에도 영토를 그대로 보존하면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스라엘을 털곤 하였다(2열왕 13,20). 그러나 아시리아의 세력이 잠시 주춤한 틈을 타, 유다 왕 우찌야는 여로보함 치세에 이어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다. 이때 요르단강 동쪽 지역을 점령하여 암몬들에게 조공을 받았는데(2역대 26,8), 이 시기에 모압 역시 유다의 영향권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733년에 아시리아가 다시 세력을 정비해서 팔레스티나와 트랜스요르단을 휩쓸게 됨에 따라, 모압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모압은 아수르바니팔이 다스릴 시절에 아랍인들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역사의 두 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모압은 느보산 위에서, 메드바에서 통곡하고 모두들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깍는다”(이사 15,2)는 예언 말씀 그대로였다.
철기 시대의 모압인들은 청동기 시대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종교 관습을 그대로 전수받았는데, 이들의 신앙행태는 요르단강 서편에 살았던 팔레스티나의 가나안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벳-바알-브올, 벳-바알-므온, 베못-바알 등의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가나안 원주민들의 바알 신앙이 그대로 행해졌을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왕의 큰길에서 밀려들어오는 남방과 북방의 종교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모압은 그모스신을 국가신으로 받들었다.
모압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점령해 들어가면서 야훼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고 ale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것은 그모스신이 자신들에게 화를 냈기 때문이며, 이후 빼앗긴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모스신이 다시 모압 백성에게 호의를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까닭에 예레미야는 모압이 망하리라는 뜻으로 “그모스신의 백성은 끝장이 났다”(예레 48,46)고 선포한다.
<성경의 민족들>
모압족
모압은 사해 동쪽 요르단 지역에 살던 민족으로 오랫동안 이스라엘과 부딪쳤다.
이들의 시조는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룻의 딸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창세기의 기록이다.
소돔과 고모라 도시가 망한 후 룻은 산으로 올라가 두 딸과 함께 살았다.
그때 맏딸이 작은 딸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우리에게 올 남자가 없구나. 아버지에게 술을 두시게 한 다음 함께 누워 그분에게서 자손을 얻자."
그날 밤 맏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들게 한 다음 함께 누웠다.
이렇게 해서 룻의 딸은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맏딸은 아들을 낳고 모압이라 했다.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모압족의 조상이다.(창세 19,30-38)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두 딸이 아버지 룻을 술 취하게 한 다음 아이를 가지려 했다는 내용에 얼마만큼의 신빙성이 있을까?
후대의 견해는 모압족을 깎아 내리기 위한 기록에 비중을 두고 있다.
출생 자체부터 이스라엘에 예속되었음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모압족은 이스라엘과 가까운 관계면서도 껄끄러운 관계였다.
당시 모압족의 본거지였던 요르단강 동편에는 암몬족도 함께 있었다.
암몬 족은 오늘날의 요르단 수도인 '암만'을 중심으로 북부 지역에 살았고 모압은 요르단 남부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암몬족 북쪽에는 아람족이 버티고 있었다.
이집트를 탈출했던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로 가나안 땅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압족이 살던 남부지역을 지나가야했다.
모세는 정중하게 통과를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엄청난 무리가 국경을 건너게 해달라니 허락할리 만무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이냐 우회냐를 의논한다.
우회할 것을 결정한다.
모압족은 만만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모세는 북쪽의 암몬족과 전투를 벌인 뒤에 그곳을 통과했다.
모압족은 다윗 왕의 외가가 되는 룻이 속한 민족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다윗은 사울의 박해를 피해 모압 땅으로 피신한 적이 있다.
다윗은 환영을 받았고 그곳에서 숨어 지냈다.
하지만 왕이 된 뒤에는 모압을 쳐서 속국으로 만들었다(2사무 8.2)
역사의 아이러니다.
모압은 인근 나라를 정복할 만큼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으며 고지대에 위치해 외세의 침입을 잘 견딜 수 있었다.(예레 48.11)
그러나 다윗에게 패한 뒤에는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고 이후 바빌론의 포로시대를 거치면서 주변 국가에 흡수되어 버렸다.
~ 신은근 바오로 신부 ~
<성경의 민족들>
11) 암 몬20121005성경자료실
사해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모압의 북동쪽에 자리 잡은 암몬족이 어디에서 기원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기록상으로는 암몬의 역사가 기원전 8세기경 아시리아 제국의 연대기에 가서야 언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발굴의 결과로 미루어 볼 때, 북쪽이나 남쪽에서 이동해 온 셈족 유목민의 일부가 기원전 13세기 초에 라빠 암몬을 중심으로 모여 살다가, 기원전 11세기 무렵에 조직된 왕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떠돌아다니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진입해 들어갈 당시, 암몬 왕국은 아모리족이 세운 시혼 왕국처럼 이스라엘의 정복대상으로 직접 다루어지지 않는다. 시혼의 동쪽에 접경해 있는 암몬은 남쪽에 접경해 있는 모압과는 달리 시혼과의 국경이 뚜렷한 지형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시혼과의 싸움이 곧바로 암몬에게 번질 가능성이 다분히 많았다. 그런데도 암몬은 가나안에 진입하는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이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를 당시까지만 해도 암몬이 도시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지 않고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고고학적인 발굴로 볼 때 암몬은 이 시기에 이미 도시국가를 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시혼과 싸움을 벌이면서도 암몬과는 싸우지 않았다는 설명(신명 2,19)은 후대의 상황이 투영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진입할 당시에는 특별할 것 없는 도시국가에 불과했지만, 성서가 기록될 때에는 아람 치세 하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암몬을 이스라엘이 감히 정복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를 칼로 쳐 죽이고 아르논에서 야뽁에 이르는 그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암몬 백성의 지경은 넘지 않았다. 암몬 백성의 지경은 수비가 튼튼하였기 때문이다”(민수 21,24). 암몬이 이스라엘과 군사적으로 충돌한 것은 판관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모압 왕 에글론이 이스라엘에 쳐들어가 종려나무 도시(=예리고?)를 점령할 때에 암몬은 아말렉과 합세하여 모압을 지원하였다(판관 3, 13).
이후로 암몬은 간접적인 군사지원에만 그치지 않고, 국경지대를 커다란 돌 모양으로 견고한 요새를 만들고는 직접 이스라엘에 여러 차례 쳐들어 왔다. 이런 일련의 군사 행동으로 암몬의 영토는 점차 팽창되어서 길르앗을 점령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요르단강 서편까지 넘보게 되었다. 그들은 요르단강 건너편 길르앗 지방 아모리 땅에 사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십팔 년 동안 억압하며 짓밟았다.
암몬 백성은 또 요르단강을 건너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을 쳤다“(판관10,9). 판관시대를 거쳐 왕정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스라엘과 암몬의 싸움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암몬 왕 나하스는 이스라엘에 아직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틈을 타, 갈릴래아 호수 남쪽 방면에 있는 야베스 길르앗까지 쳐들어가는 등 영토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1사무 11,1). 하지만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사울에게 승리를 안겨 줌으로써 이스라엘 왕인 사울의 위치만 확고히 해주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암몬은 이스라엘에 왕권이 확립된 후에는 에돔과 모압 등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위세에 눌려 지내야만 했다. “사울은 모압, 암몬 백성, 에돔, 소바 왕, 불레셋 등 사방에 있는 원수들과 싸울 때 마다 승리를 거두어 이스라엘 왕위를 굳혔다”(1사무 14,47). 급기야 나하스의 아들 하눈이 암몬을 다스릴 때에, 다윗이 보낸 조문 사절단을 모욕한 사건을 빌미로 삼아 쳐들어 온 다윗에게 수도 라빠 암몬까지 점령당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2사무 10-12장).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가 다윗의 음모에 말려들어 전사한 곳도 바로 이 라빠 암몬 전투에서다.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내분으로 다윗이 압살롬에 쫓겨 피난길에 올랐을 때에 암몬 땅 라빠에서 나하스의 아들 소비가 나와 맞으며 다윗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 했던 것(2사무 17,27)을 보면, 다윗의 암몬 정복으로 말미암아 암몬의 옛 왕가가 단절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누리던 솔로몬 시절에도 암몬은 여전히 이스라엘에 예속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솔로몬 왕이 취한 결혼외교로 말미암아 외국인 왕비들이 믿고 있던 종교제의가 행해질 때에(1열왕 11,1-8), 암몬인들이 섬기던 밀곰과 몰록 숭배도 이스라엘 안에 영향을 끼쳤다. 1세기 동안을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죽어지냈던 암몬이 기세를 펼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9세기경이다. 아람과 한 편이 되어 시리아와 맞서 싸움으로써 사막의 대상무역의 이권을 취 했는가 하면, 모압과 에돔과 연합해서 유다의 여호사밧을 침공해 들어오기도 했다(2역대 20,1).
하지만 우찌야와 요담이 유다를 다스리던 시절에는 세력이 꺾여 조공을 바치는 신세로 전락하였다(2역대 26,8; 27,5). 이렇게 늘 힘겨루기에 따라 서로간의 위상을 정립하였던 군소국가 유다와 암몬은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그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암몬은 아시리아의 보호를 받으며 사막의 대상무역을 계속하면서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원전 652년에 아수르바니팔의 왕위권 쟁탈을 둘러싸고 아시리아 전역에 내란이 벌어짐으로써, 암몬은 아시리아에 반기를 등 아랍 족 속의 의협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위협에 자력으로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던 암몬은 신흥대국인 신바빌로니아의 세력권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암몬은 기원전 601년에는 신바빌로니아에 반기를 든 유다의 여호야킴을 바빌론군과 시리아군과 모압군과 연합하여 공격하기도 하고(2열왕 24,1-2), 유다가 멸망한 후에는 유다가 다스리던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자 게달리야를 암살했던 이스마엘 일행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예레 41,10.15).
암몬의 역사가 언제 끝났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고고학적인 발굴 결과 기원전 6세기 중엽 이전에 인구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보아 유다와 마찬가지로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했을 것이다. “너 사람아, 바빌론 왕이 칼을 빼들고 한 길로 가다가 두 갈래로 갈리게 되는 길목에 방향 표지판을 새겨 세워라. 그 칼이 암몬 도시 라빠로도 갈 수 있고, 유다 중심부에 자리 잡은 예루살렘으로도 갈 수 있게 표지판을 새겨 세워라. 바빌론 왕이 그 길목에 멈추어 서서 점을 칠 것이다”(에제 21,24-26). 이 점궤에 따라서 유다가 먼저 멸망당했지만, 암몬 또한 그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암몬족
룻은 아브라함의 조카로 소돔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 사건 때 아내를 잃고 만다.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권고를 무시하다소금기둥이 된 것이다.(창세기 19.26)
이후 룻은 자신의 딸을 취해 두 아들을 낳는다.
'모압'과 벤 암미'다.(창세기 19.30~38)
창세기는 이들을 모압족과 암몬족의 시조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아랍인들의 생각은 다르다.
아무튼 암몬족은 요르단 강 동편에 자리 잡고 살았다.
그들의 중심도시를 성경에서는 '라빠'라 했다.(1역대 20.1)
오늘날 '요르단 왕국'의 수도인 암만이다.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공항검문이 까다로우면 여행객들은 암만을 통해 들어갔다.
자동차를 이용해 국경을 넘은 것이다.
이스라엘도 그쪽 통로는 수월하게 열었다.
생필품이 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리적으로 가까웠다.
암만지역은 물이 풍부하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곳곳에 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가나안 정착을 시도할 때 암몬족은 이미 군사체제를 갖춘 막강한 부족이었다.(민수 21.24)
그런데 모세는 암몬인의 땅 절반을 '가드지파'의 땅으로 미리 분배해버린다.(여호 13.24~28)
남의 땅을 이스라엘 것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후 두 민족은 틈만 나면 부딪친다.
서로 자신의 땅이라 외치며 싸웠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암만(라빠)을 처음으로 정복한 것은 다윗 임금 시절이다.(2사무 12.26)
다윗의 심복이었던 요압장군은 오랜 전투 끝에 암만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사무엘기 하권에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 세바'와 혼인하기 위해
우리야를 격렬한 전쟁터로 보내 죽게 하는 대목이 있다.(2사무 11.15) 암몬족과의 전투였다.
우리야는 암만의 성벽 앞에서 활에 맞아 전사했던 것이다.
이후 암만족은 강대국에 끌려가는 운명이 된다.
기원전 3세기에는 '그리스'가 팔레스티나를 장악하자 암만은 '필라델피아'란 이름으로 바뀐다.
이집트 임금 '필라델푸스'가 자신의 이름을 따라 바꾼 것이다.
이 명칭은 로마 시대까지 통용되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요르단 강 동쪽의 '10도시'를 '데카폴리스'라 했는데(마태 4.25) 암만은 가장 화려한 도시였다.
bc63년부터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로마식으로 리모델링했기 때문이다ㅣ
이후부터 암만(필라델피아)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도시로 떠오른다.
기원후 4세기에는 암만에도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고 대주교가 거주하는 큰 교회가 있었다.
하지만 635년 아랍통치가 시작되면서 기독교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20세기 초에는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았고 세계대전 이후 '요르단 왕국'의 출범과 함께 암만은 수도가 되었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
<성경의 민족들>
12) 북왕국을 멸망시킨 아시리아20121007성경자료실
아시리아가 기원된 곳은 우리에게 바벨탑 이야기로 잘 알려진 시날 지방이다. “그의 나라는 시날 지방인 바벨과 에렉과 아깟과 갈네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아시리아로 나와서 니느웨와 르호봇성과 갈라를 세웠다”(창세 10,10). 여기서 시날은 수메르를 가리키며, 현재 이라크의 남부 지방에 해당된다.
고대 아시리아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해 있어서 농경하기에 적합한 비옥한 충적토가 니느웨에서 앗수르에 이르기까지 펼쳐져 있긴 했지만, 그 남쪽으로는 비가 별로 내리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이로 볼 때, 세부내용 없이 이름만 나열되는 초기 아시리아 왕들이 한결같이 ‘천막에 사는’ 것으로 제시됨은 아마도 유목생활을 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아시리아가 역사적으로 비로소 드러나게 된 것은 이 지역을 다스리던 우르 제3왕조(기원전 21세기)가 망하고 나서부터이다. 아시리아는 바빌론의 함무라비와 같은 시대인 샴시 아닷 1세(기원전 19세기) 때에 전성기를 맞아 마리 왕국을 점령하기도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후리족이 세운 미탄니 및 바빌로니아의 봉신이 되고 말았다. 아마르나 시대인 기원전 14세기에 다시 독립을 쟁취한 아시리아는 투쿨티니누르타 1세(기원전 13세기) 시절에 바빌로니아에게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는 개가를 올리는데, 이로 말미암아 변두리에 위치해 있던 아시리아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문명의 핵심권에 있는 바빌로니아의 영향을,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많이 받게 되었다.
한편 이시기에는 아시리아의 남서쪽 방면인 팔레스티나에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았는데, 해양민족인 불레셋족이 이집트로 쳐들어왔다가 패한 후 일부가 이곳에 정착하는가 하면, 아마도 여호수아가 연관되어 있었을 아람인들의 이동도 이 무렵에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기원전 1000년경에는 떠돌아다니던 아람인들의 압력이 특히 심해져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도시들은 시시때때로 약탈을 당해야만 했다. 이런 현상은 아람인들이 나라를 세워 정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람인들이 나라를 세운 뒤에 아시리아는 본격적으로 영토 팽창 정책을 펼쳐, 아슈르 나시르 아플리 2세(기원전 883-859)와 살마네셀 3세(기원전858-824)때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 두 왕은 직접적으로는 시리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오므리에서 아합, 예후로 이어지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외정책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시 말해서 시리아 벤하닷의 이스라엘 침공은 아시리아의 아슈르 니스르 아플 리가 아람인들이 세운 빗 아다니 왕국(메데덴; 아모 1,5)을 쳐부수고 시리아 북쪽을 거쳐서 지중해에 이르는 길을 닦게 됨으로써 유발된 것으로 보인다. 수도 다마스커스로 통하는 북방 무역로가 아시리아에 의해서 차단되자 남방 무역로라도 완전히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1열왕 20,2 이하). 이 시기에 아합이 시돈의 이세벨과 정략결혼한것도 교역량이 급격히 늘어난 띠로와 시돈과의 무역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1 열왕 16,31)...
아시리아는 살마네셀 3세 시절에 시리아를 거쳐 지중해로 통하는 무역로를 더욱 강화시키려 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연합하여 기원전 853년에 카르카르에서 아시리아와 대접전을 벌임으로써 살마네셀 3세의 목적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스라엘에서 각각 혁명이 일어나 왕조가 바뀌는 와중에 두 나라 사이의 협력관계가 틀어져 아시리아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되자,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해 지지기반이 허약했던 예후는 재빠르게 아시리아 왕 살마네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침으로써 허약한 자기 왕권을 유지시켜 나가는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8세기 초에는 아시리아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 우라르트 왕국의 세력이 위축되었다. 그 틈을 타 디글랏 빌레셀 3세(=불)가 기원전 746년에 혁명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자, 아시리아에서 벗어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이스라엘의 므나헴이 반기를 들지만 아시리아의 즉각적인 침공을 받아 “왕의 자리를 지키도록 도와 달라고 하며 은 천 달란트를”(2열왕 15,19) 바치는 굴욕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아시리아의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애썼으나 당시의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탓에 계속해서 아시리아에 무릎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시리아와 연합하여 친아시리아 정책을 표방하는 남왕국 유다를 공격하다가 베가가 폐위되는가 하면, 그 뒤를 이은 호세아도 이집트의 사주를 받아 아시리아에 대항하다가 살마네셀 5세(기원전727-722)의 침입을 받아 기원전 722년에 나라 전체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고야 말았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반역의 뿌리를 근절시키고자 3년간 성 안에서 아시리아에 끈질기게 대항한 사마리아의 주민을 대거 다른 나라로 이주시켰고, 대신 “바빌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사마리아 성읍들에 이주시켜 그들로 하여금 그 곳에서 자리 잡고 살게 하였다”(2열왕 17,24). 이렇게 정복지의 주민들을 서로 맞바꾸는 아시리아의 이주정책은 훗날 팔레스티나에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이 서로 반복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었지만, 다른 편으로는 서로 다른 나라의 문화에 접하게 함으로써 고대 근동의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의 초석이 되었다.
한편 아시리아의 속국이었던 우라르트 및 바빌로니아 역시 독립을 쟁취하려고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삼마네셀 5세 이후 왕위에 올랐던 사르곤 2세와 산헤립은 끊임없는 싸움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에 유다 왕 히즈키야도 아시리아가 반대편에서 일으킨 바빌로니아의 므로닥 발라단(2열왕 20,12)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팔레스티나에 신경을 쓰지 못하리라는 생각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기원전 701년에 신헤립의 침공을 받고야 말았다.
이후 아시리아는 에살하똔을 거쳐 아수르바니팔 시절에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국력을 소모하다가, 기원전 629년에 아수르바니팔이 죽고 나자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수습하지 못해 기원전 612년 바빌로니아와 메대의 연합군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점령당하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아시리아는 이집트의 도움을 받아 회생하려고 고군분투하였으나 기원전 605년에 가르그미스 전투에서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에게 완전히 꺾임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성경의 민족들>20121009성경자료실
히타이트 족
<신 앞에서 기도하는 히타이트 왕>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의 한 동굴에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 동굴은 히타이트 사람 '에프론'의 소유였다.
아브라함은 장차 이곳에 자신과 후손들이 묻히기를 바라면서 그 동굴을 400세겔에 샀다.(창세 23.16)
이렇듯 히타이트 사람들은 아브라함 초기부터 이스라엘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들의 본거지는 '하투사'였다.
오늘날 터키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북쪽으로 대략 200km 지점에 있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했고 한때는 이집트까지 점령한 적도 있었다.
역사상 어떤 나라도 그만큼 단시일에 대제국을 형성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원인은 그들이 자랑하던 전차에 있었다.
두 명이 탄 전차에서 한 사람은 말을 몰고 다른 사람은 활을 쏘는 속도전으로 중동지역을 누볐던 것이다.
한 편 이들이 인류 최초로 철기 문화를 시작한 민족임이 고고학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수메르 인들의 설형문자에도 이들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그만큼 뛰어난 기술을 지닌 민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12세기부터 내분으로 몰락을 자초해 '아시리아'에 흡수되고 만다.
아시리아는 티그리스 강 상류에서 시작된 나라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국가였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뒤 그곳의 '니네베'를 수도로 정했다.
다윗의 군사 가운데는 히타이트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 그들은 용병으로 이스라엘 진영에 있었을 것이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심복으로 따라다녔던 아하멜렉도 히타이트 출신이었고
(1사무 26.6)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의 첫 남편 '우리야' 역시 히타이트 사람이었다.(2사무 11.3)
그는 이스라엘 군대의 뛰어난 장교였지만(역대 11.41) 다윗에 의해 제거되었다.
밧 세바의 아버지는 '엘리암'인데 그는 다윗의 후원자였던 '아히토펠'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우리야는 이스라엘 명문가에 장가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똑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훗날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반란에 아히토펠이 가담하여 다윗 진영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는 다윗에세 경각심을 일깨우려 했던 것 같다.
자신의 손녀 '밧 세바'를 탐내어 우리야를 죽인 것에 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 신은근 바오로 신부 ~
<수메르인>20121011성경자료실
인류 최초의 문명은 수메르 문화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들의 문화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 삼각주를 이루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남쪽으로 내려와 페르시아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다.
성경에서는 이 지점을 갈데아 지방 혹은 남부 바빌로니아라 불렀다.
현재는 이라크 땅이다.
이곳의 중심도시는 아브라함의 고향이었던 '우르'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뿌리는 수메르인과 연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발굴에 의하면 이곳에는 굉장한 주거지역이 있었다.
수십 개의 방을 지닌 건물터가 발견되었고 상하수도 시설도 확인되었다.
배관은 도자기를 구워 물이 흘러가도록 했다.
수메르인은 이렇듯 고도로 발달된 문명 속에 살았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낙후된 북쪽으로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수메르인은 인류 최초로 문자도 만들었다.
쐐기 문자다.
공충 쇄기가 아니고 나무를 고정시킬 때 박는 'v'자 형태의 물건을 말한다.
이들은 또한 처음으로 법전을 편찬했으며, 최초로 도시국가를 선보였다.
하지만 북쪽 민족에게 번갈아 정복되면서 도시국가는 해체되었고 수메르의 왕국은 등장하지 못했다.
기원전 1900년 경 티그리스 강변에 나타난 아모리 족은 이들를 정복한 뒤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는데 고대 바빌로니아다.
이후 수메르인은 바빌로니아의 한 종족으로 남게 된다.
수메르인이 남긴 뛰어난 건축물은 '지구라트'라 불리는 피라미드 형태의 탑이다.
진흙벽돌을 쌓아 올린 것으로 꼭대기에는 신전이 있었고 우르의 수호신 이난나inanaa를 모셨다.
수메르인의 거주지는 강 하류였기에 폭우가 내리거나 강물이 넘치면 흙으로 지은 짐들은 자주 무너졌다.
그래서 신들을 달래기 위해 종교의식을 발전시켰고 강력한 제관 계급을 모셨던 것이다.
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의 등장으로 멸망한다.
오늘날의 이란이다.
따라서 이라크와 이란은 영원한 숙적관계임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는 유프라테스 강이 범란해도 손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물줄기가 바뀌어 수메르인의 본거지였던 우르지방은 사막으로 변해버렸다.
수메르란 말의 기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노아의 아들 셈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은 공인된 견해가 아니다.
구약 성경 이전부터 수메르 인은 존재했기 때문이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
아시리아인
<아시리아 기마대>
아시리아란 말은 그들의 수호신 '아슈르'에서 유래되었다. 이들은 또한 수호신의 신전이 있던 도시도 아슈르라 했는데 티그리스 강변 산악지대에 있었다. 훗날 제국이 된 아시리는 티그리스 강 상류를 아슈르의 땅이라 부르며 신성시했다.
하지만 수도는 니네배였다. 우리에게는 유나 예언자와 연관되어 잘 알려진 도시다. 오늘날 이라크의 모술지역이 니네배가 있던 곳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모술은 옛날의 니네배인 샘이다. 모술은 이라크의 두 번째 도시로 티그리스강변 동쪽 평원에 있다. 예부터 곡물과 대리석이 풍부해 상인들의 거점도시였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무솔리니'라는 성姓은 모술상인의 후예에서 유래되었다. 모슬린이란 면직물 역시 모술에서 만들어졌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십자군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이렇듯 모술을 근대까지 화려한 니네배의 흔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석유생산 도시로 주목받고 있다.
아시리아가 중동의 강자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전차부대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동력을 바탕으로 시리아와 지중해 연안 도시들을 복속시켰고 한 때는 이집트 국경까지 세력을 확장했었다. 이렇게 해서 히타이트의 철과 레바논의 삼나무를 독식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잔인한 민족이었다. 구약성경도 이들에 대한 기록는 대단히 차갑다. 아시리아는 쉽게 공격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태동한 국가였다ㅑ. 따라서 투쟁이 곧 생존이었다. 이들은 식민지의 반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보복했고 때로는 주민들을 송두리 채 몰아 냈다. 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주민들이 그런 케이스였다. 아시리아는 이들을 티그리스 강 북쪽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기원전 722년의 일이다.
당시 임금은 사르곤 2세였다. 이후 아시리아는 전성기를 누리지만 1세기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기원전 609년 멸망한다. 메소포타미아 부족들을 규합한 바빌로니아의 연합군에게 패배한 것이다. 이제 중동지역응 아시리아인이 아니라 바빌로니아인이 세력을 잡게된다. 새로운 제국의 중심인물은 신바빌로니아의 두 번째 황제로 등극한 '네부카드네자르'였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
(바빌로니아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
<바빌로니아인>20121014성경자료실
바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 아래쪽에서 시작된 고대 국가의 명칭이다. 오늘날로 치면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이라크 남부지역이다. 그리고 수도 바빌론은 수천 년 동안 이 지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제국이 등장하기 전에는 이 지역의 남쪽은 수메르라 불렀고 북쪽은 아카드라 했다.
수메르는 도시국가의 연합체였다. 그런데 주도권을 잡으려 자주 싸웠다. 그러면 북쪽의 아카드가 틈새를 노리고 침략해왔다. 그럴 때면 연합군을 형성해 아카드인을 물리쳤다. 이렇듯 민족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다. 그러면서도 풍성한 문화를 낳았다. 인류 최초로 문자와 법전을 만들었고 도자기 굽는 화로와 밭가는 쟁기도 그들의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두 민족은 북쪽의 아모리족에게 정복당하고 만다. 이들은 유프라테스 상류에 살던 유목민으로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300년 가까이 통치하며 바빌론 중심의 문화를 확정지었다.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은 이들에게 흡수되어 하나의 부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모리족의 팽창을 주도한 인물은 제1왕조의 여섯 번째 임금이었던 함무라비다.그가 만든 법전은 1901년 이란의 고대도시 수사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2.25m의 돌기둥에 282조의 규정이 쐐기 문자로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함무라비가 죽자 바빌로니아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히타이트 족의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기도 한다. 그러다가 제2왕조가 부활했지만 1세기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다시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이후 기원전 7세기가 되자 비로소 제3왕조인 '신바빌로니아'가 출현하게 된다. 유명한 임금은 이스라엘을 바빌론의 포로로 데려갔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다. 그는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바빌론의 영화를 재현했으며 뛰어난 건축물인 지구라트를 되살렸다.
기원전 539년 신흥국가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유다인들도 이때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키루는 바빌론을 파괴하지 않았고 그들의 종교도 인정하였다. 이 상태는 bc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희랍인의시대가 되자 바빌로니아인은 변방의 주민으로 남게 된다. 이들의 후속이 오늘날의 이라크 사람들이다.
~ 신은근 바오로 신부 ~
<갈데아인>20121016성경자료실
메소포타미아는 강과 강사이라는 의미다. 메소는 중간을 뜻한다. 성악에서도 메조소프라노는 알토와 소프라노 사이에 해당된다. 두 강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다. 아르메니아에서 발원해 터키를 지나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간다. 그런데 두 강은 페르시아 만에서 160km 올라간 지점에서 합류한다. 따라서 이곳부터는 퇴적층이 발달해 비옥한 땅이 생겨났고 일찍부터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곳이 갈데아 지역이다. 현재는 이라크에 속한다. 산이 없고 사방이 노출되어 전쟁에서는 불리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오랫동안 지배한 세력도 없다. 돌이 없어 흙벽돌을 구어 건축했기에 옛 모습도 찾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토판에 새겨진 기록이 발견되어 옛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서는 갈데아를 바빌로니아와 동일시하고 있다. 하지만 갈데아란 지명이 먼저고 이곳에 등장했던 강력한 4나라 중 하나가 바빌로니아다. 첫째 강국은 메소포타미아 상부에 있던 아시리아다. 이때 하류에는 고대 바빌론이 등장했지만 강국이 된 것은 아시리아를 멸하고 등장한 신바빌로니아다. 특히 신바빌로니아를 갈데아 제국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중부에는 메디아가 있었다. 4번째 강국은 바빌로니아를 멸하고 나타난 페르시아다. 이후도 갈데아란 지명은 존재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데아의 우르였다.(창세 11.31)
갈데아인들은 음력을 사용했다. 달의 운행을 바탕으로 1년을 12달로 나누었고, 한 달을 30일로 맞추었다. 1시간을 60분으로 나누고, 7일을 1주일로 정한 것도 이들이었다. 자신들이 발견한 다섯 행성(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으로 요일 이름을 지은 것도 이들의 문명이었다. 이들은 또한 우수한 건축물을 남겼다. 고대건축의 칠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여겨지는 공중정원도 이들의 작품이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고향을 그리워하던 아내를 위해 이 공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훗날 갈데아 지역에 기독교를 전한 이는 토머스 사도였다. 기원후 1세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인도까지 전파되었다. 이들이 갈데아의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과는 구분되어 갈데아 정교회로 불리고 있다. 19세기 말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디트로이트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지금도 종교의식에서는 갈데아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신은근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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