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헨리쿠스(Henricus, 또는 헨리코)는 973년 5월 6일 바이에른(Bayern) 또는 힐데스하임(Hildesheim)에서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2세와 부르고뉴(Burgogne)의 왕인 콘라트(Conrad)의 딸 기셀라(Gisela) 사이에서 태어났다.
995년에 사망한 부친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Bayern)의 공작 하인리히 4세가 되었고, 998년에는 룩셈부르크의 여백작인 성녀 쿠네군다(Cunegundis, 3월 3일)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1002년 오토 3세의 사망 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일 마인츠(Mainz)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며, 1014년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하였다. 그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는 독일 성직계의 강화와 교회의 개혁과 쇄신이었다.
성 헨리쿠스는 성녀 쿠네군다와의 혼인 중에 동정을 지켜 자식을 얻지 못했다는 전설도 남아 있을 만큼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했다. 그의 스승은 성 볼프강(Wolfgang, 10월 31일)이었고, 클뤼니(Cluny) 수도원의 기틀을 마련한 성 오딜로(Odilo, 1월 1일)와 리카르두스(Richardus, 6월 14일)는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수도자가 되려고 노력하였지만 직책상 뜻을 이룰 수가 없었으나 그의 신심은 수도자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밤베르크(Bamberg) 교구를 설정하고, 그곳을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1024년 7월 13일 괴팅겐(Gottingen) 근처의 그로나(Grona)에서 세상을 떠나 밤베르크의 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성 헨리쿠스 2세는 1146년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에 의해 시성되어, 중세 독일의 왕들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왕이 되었다.
강론 : (마태 10,34-11,1)
<평화, 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1) 이 말씀을,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는데,
세상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선택하였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거부하는 것이고,
평화를 거부하는 것은 칼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신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주신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예수가 칼을 주었다고 억지 주장을 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9-20)."
이 말씀을 앞의 평화에 관한 말씀과 연결하면,
'빛'은 '평화'이고, '어둠'은 '칼'입니다.
인간 세상을 보면, 평화보다 전쟁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보다는 미움과 증오심을, 용서보다는 복수를, 일치보다는 편 가르기를,
믿음보다는 의심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전쟁이 예수님 때문인가?" 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일이 많습니다.
자기들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일으킨 전쟁에 예수님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2)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내가 '세상이 주는 평화 - 세속적인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칼'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얻기 위해서 세속의 거짓 평화를 버리는
'선택과 결단'이 됩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세속 사람들이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들,
즉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혼자만의 안전을 추구하는 이기심,
영혼이야 어떻게 되든지 관심 없고 몸만 편안하면 그만이라는 육적인 사고방식,
무엇이든지 많이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소유욕 등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버리려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결단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는 거짓 평화를 잘라내는 칼이 됩니다.
3)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라는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속 한가운데에서 살면서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신앙을 증언해야 하는 사도들과 신앙인들은
마치 이리 떼 가운데에 놓여 있는 양들과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옛날 교리서에서는 천국에 있는 신앙인들을 '승리한 교회',
연옥에 있는 신앙인들을 '보속하는 교회',
지상에서 살고 있는 신앙인들을 '싸우는 교회' 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신앙인들이 믿음, 희망,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영혼의 평화를 누린다고 해도,
지상에서의 신앙생활은 '싸움'이기 때문에 고달프고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도 많고, 유혹을 받을 때도 많습니다.
신앙생활과 먹고사는 문제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도 많습니다.
따라서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라는 말씀을
"누구나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많은 어려움들을 참고 견뎌야 한다."가 됩니다.
잘 참고 견디면,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말씀을 내적 갈등 상황에 관한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21-23)."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인물도 이런 갈등을 겪었으니...)
죄가 되는 일인 줄 알면서도 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하고 싶다는 욕망과 죄가 되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반대로,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하기 싫은 일들이 있습니다.
싫으니까 하지 말자는 욕망과 신앙인이니까 해야 한다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런 갈등 때문에 내적 평화를 잃게 되는데,
그럴 때에 더욱 단호한 결단과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칼'은
그런 내적 갈등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
즉 글자 그대로 '칼 같은' 결단과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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