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는 복음서에서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루가 8,2)로 묘사되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그 밑에 서 있었으며(요한 19,25),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일요일 이른 아침에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마르 16,9),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린 사람도 그녀이다(요한 20,11-18).
복음서에 언급된 또 다른 마리아는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가 7,36-50)와 성녀 마르타(Martha, 7월 29일)의 동생인 베타니아의 마리아, 그리고 클레오파(Cleophas)의 아내 마리아(4월 9일)가 있으나, 위의 죄 많은 여자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전승에서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믿어왔다. 중세 시대에 있었던 3명의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사도 성 요한(Joannes)과 약혼한 사이였다고도 한다. 성령 강림 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님과 성 요한과 함께 에페수스(Ephesus)로 가서 전교하다가 그곳에 묻혔다고 전해온다.
강론 : (요한 20,1-2.11-18)
<사랑>
복음 말씀이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 제자'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다른 사도들은 달아났거나 숨어 있는 상황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켰고,
무덤에 갔고,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찾으려고 노력했고,
자기가 직접 시신을 모셔 가려고 했습니다(요한 19,25; 20,1.15).
그것은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신자)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서는 몹시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가르침 그대로
사랑하는 분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는(요한 15,13)
'큰 사랑'을 실천한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신 여자입니다(루카 8,2).
그 일을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라는 예수님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곱 마귀' 라는 말을 어떤 '죄'를 뜻하는 말로 생각할 이유가 없고,
'죄 많은 여자'가 마리아 막달레나였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어떤 중병에 걸렸다가 예수님 덕분에 치유되었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리아가 예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께 그렇게 '큰 사랑'을 드린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런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만 특별히 편애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사랑을 적게 받아서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시는데,
우리 쪽에서 예수님께 드리는 사랑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라는 말씀은,
"이 여자는 자신이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감사와 큰 사랑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자신이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감사하고 적게 사랑한다." 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사랑을 받는데도 받는 쪽의 마음가짐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도들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래서 사도들보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래서 가장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도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편애하신 일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먼저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먼저 받게 됩니다.
무덤에 시신이 없다는 것을 마리아가 사도들에게 알렸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바로 가서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요한 20,1-10).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냥' 되돌아갔고, 마리아만 무덤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당시 상황을 잘 모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려고
숙소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도들과 의논하려고 간 것인지,
아니면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는지 알아보려고 간 것인지...
어떻든 마리아가 무덤에 남은 것은 차마 그곳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고,
그것도 역시 마리아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사도들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서 울고 있었고,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요한 20,11-15).
따라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마리아의 '부활 신앙'에 응답하신 일이 아니라, '사랑'에 응답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없이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제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났을 것입니다.
다만, 아직 '부활 신앙'을 갖기 전 단계였을 뿐입니다.
(당시에 '부활 신앙'에 관해서는 모든 제자가 다 같은 수준에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예수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마태 25,40).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그대로
이웃 사랑도 잘 실천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가 바라는 일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들을,
즉 예수님의 여러 가지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그대로 실행해야 합니다.
그 실천이 바로 '예수님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고 시키셨습니다(20,17).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즉시 사도들에게로 갔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요한 20,18).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던 모습보다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사랑을 더 잘 드러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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