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복음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나무입니다.
무화과 나무입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무화과 나무는 가장 총애를 받는 나무입니다.
석류 와 무화과나무는 정탐꾼들이 그 땅의 풍요함을 보여주기 위한 물증으로 내놓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및 둘레의 굵기가 약 1미터, 높이는 5미터에서 6미터까지 자라고,
가지는 8m~10m까지 퍼지기 때문에, 그늘로서 아주 가치있는 나무로 사이프러스에서는 집문 앞에
특히 우물가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쉬게 하기위한 쉼터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나무의 무성함 때문에 그아래서 명상을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좋은 나무를 마치 저주하시 듯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을 하고 계셔서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가지게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고 나무를 저주하는 것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주님게서 지독하게 조급한 분이 아니신가
너무 이기적인 분이 아니신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왜 그러셨을까요?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에 왜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나무를 보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의 병적인 삶에대한 경고였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맺을 때 잎과 꽃도 무성해진다고 하는데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보신 때는 열매를 맺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정상이 아니란 것이지요.
이 무화과나무의 생명이 그리 길지 않음을 그리고 열매를 맺을 수가 없음을 예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내적인 성장에 관심이 없어서 무화과나무처럼 열매가 없음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사람은 사회적동물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살 때에 힘이 나고, 삶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진것들에 자신을 맞추기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싫다고 자기만의 삶을 고집한다면 사회적으로 부적응자 낙인이 찍히고 말 것입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이 제시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다 보면 내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가 없어지고, 집단적 사고방식이 자기 안에서 명령자의 역할을 하기 되지요.
젊었을 때는 이런 현상을 느끼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젊은 시절에는 사회적으로 승진하고 경제적인 발판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인 자리가 잡히고 자신의 삶을 찾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을 때
집단적 사고 안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자조적인 생각과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일탈하여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는 주장은
가족과 사회에 대해 무책임한 행동이라 생각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지요.
이 나이에 다 이렇게 사는 것 아닌가요?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닌가요?
그럼, 이것 말고 다른 무슨 수라도 있나요? 하는 등의 말을 하게 됩니다.
만성적인 무기력증입니다.
이런 현상은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 심하고
개인을 존중하는 민주적인 사회보다 경직된 교조적인 사회 안에서 더 많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이런 삶을 살다보면 겉으로는 잎이 무성하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듯 보이지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살맛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내적인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영성심리학적 성경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오 21장 28절 ~ 32절 우월 콤플렉스 (0) | 2018.10.17 |
---|---|
마태오 21장 23절 ~ 27절 예수님의 당당함 (0) | 2018.10.14 |
마태오 21장 12절 ~ 17절 성전을 정화하시다 (0) | 2018.10.06 |
마태오 21장 1절 ~ 11절 미운 정, 고운 정 (0) | 2018.10.02 |
마태오 20장 29절 ~ 34절 예리코의 눈먼 두 사람 (0) | 2018.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