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를 자살이라고 하지요. 자기가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모릅니다. 교도소의 사형수들도 자신이 사형당할 날이 가까워지면 아무리 강심장인 죄수라 하더라도 마음이 약해져서 운다고 합니다.
보통사람들도 누군가가 나를 해코지 할 때 대부분의 경우 차라리 날 죽여라 하고 말하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매달린다고 합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본능적으로 살아남기를 원하는 자기마음을 꺾어버리고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지독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살하고 난후에 해주는 평가는 똑같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살을 하면 아, '참으로 안되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죽었을까' 하며 안타까워들 합니다.
예를 들어 나치수용소와 같이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상황 안에서 자살을 한 사람을 두고 마음이 안되었지만 '그래, 차라리 죽는게 나을지 몰라' 하는 마음을 가질지 모릅니다.
또한 어떤 어떤 사람에게는 '에이, 바보같이 죽기는 왜 죽어' 하며 죽은 사람에 대하여 바보스럽다는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수험생이 점수가 떨어졌다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은 경우, 애인이 변심을 하였다고 자살하는 경우, 사업이 실패하였다고 자살하는 경우 등등은 '더 살면서 노력하면 되지, 죽긴 왜 죽어'하는 소리를 하게 되지요.
그러면 유다는 자살했을 때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요? 주님을 배신하였으니 잘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죽긴 왜 죽어, 그렇게 주님게 미안하면 살면서 죄에 대한 보속을 해야지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교회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유다는 후자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복음에서 유다는 자신이 지은 죄를 뉘우치고는 은돈 서른 닢을 내던지고 목을 매었다고 합니다. 유다가 그렇게 죽음으로써 얻은 것이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자기 죄를 뉘우쳤을 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주님을 팔아넘김 덕에 얻은 돈으로 무엇인가를 하여 죄의 대가를 치루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즉 주님이 하고자 하셨던 일들을 죽을 때까지 함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한 보속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뉘우치는 그 순간에 어떤 다른 생각을 할 여지없이 바로 목을 매달아버렸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다른 가능성이나 기회에 눈을 감아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자살은 자기애적이자, 자기학대적 행위라고 이야기합니다.
홍성남 마태오 신부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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