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8,1-19,42)
<십자가>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경배이고,
예수님께서 구원과 생명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고통과 죽음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과 생명으로 가기 위해서 고통과 죽음을 지나갈 뿐입니다.
바로 그 '지나가다.' 라는 말이 '빠스카'입니다.
그런 뜻에서 성금요일은 부활절의 서막이고,
성금요일 전례와 부활절의 전례는 사실상 하나의 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생애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는 것으로 끝났다면
예수라는 분은 존경의 대상은 되었겠지만 신앙의 대상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희생하고 죽음을 받아들인 위인들이나 성인들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믿는 분은 단 한 분,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활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절이 없다면 성금요일은 그냥 '예수님의 제삿날'일 뿐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부활로 가기 위해 지나가야 할 터널 같은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이 없다면 그 어두운 터널로 들어갈 이유가 없습니다.
또 부활절이 있기 때문에 성금요일도 의미가 있습니다.
성금요일은 부활절을 준비하기 위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가? 십자가를 생략하고 바로 생명으로 갈 수는 없는가?
성주간을 건너뛰고 바로 부활절로 갈 수는 없는가?"
왜 꼭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신비' 라고 부릅니다.
'빠스카'는 '신비'입니다.
어떻든 빠스카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이치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하느님 나라, 구원, 생명은 어쩌다가 우연히 얻게 되는 행운이 아니라
'피와 땀과 눈물로 씨를 뿌리고 가꾸고 고생해서 얻는 기쁨'입니다.
추수 때의 기쁨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씨를 뿌리고 고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과 희망과 기다림이 없다면 못하거나 안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자기에게 닥친 고통을 극복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체념하는 모습도 아니고 자포자기하는 모습도 아닙니다.
참고 견디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다음 단계는 부활입니다.
우리도 어떤 고통과 고난을 겪을 때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체념과 포기는 패배하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라고 부르짖으신 것은
'절망'의 표현이 아닌가?" 라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외우신 시편 22장은
원래 절망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의 시편이고
인간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그래서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시편 22장 2절은
절망을 표현하는 구절이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구절이고,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그래도 하느님을 믿고 기다린다는 구절로 이어집니다.
"사자의 입에서, 들소들의 뿔에서 저를 살려 내소서.
당신께서는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시편 22,22-23)."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시편 22장의 첫 구절만 외우신 것이 아니라
시편 22장 전체를 외우시려고 했거나 외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참고 견딘다.'는 말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참고 견뎌야 하지만,
악(惡)은 참고 견딜 것이 아니라 물리쳐서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만나기만 하면 단호하게 쫓아내셨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셨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고통을 참고 견디셨지만 악(惡)을 참고 견디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善)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은 참고 견뎌야 하지만,
불의와 악행 자체를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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