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년 12월 9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dariaofs 2019. 12. 9. 04:52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죄와 구원, 절망과 희망이 교차합니다.

먼저 첫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창세 3,13)

제1독서는 우리를 원죄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인류의 조상과 하느님의 가슴 아픈 대면의 현장입니다.


"어찌하여..." 하시는 하느님 마음은 왜 그랬는지를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추궁의 심정이 아니라 오히려 탄식에 가까울 겁니다.


오직 그들의 행복을 위해 공들인 모든 게 무너지는 아픔과 그들이 짊어져야 할 결과를 예견하는, 안타까움 가득한 한탄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먼 옛날 하느님 앞에서 고개 숙인 채 슬픈 선고를 듣던 "첫 사람"의 처지를 반전시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합니다. 원죄에 물든 우리가 다시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오늘의 이 길지 않은 제2독서 내용 안에 거의 모든 절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웁니다. 첫 사람의 죄는 새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해 사해지고, 우리는 그 덕분에 거룩하고 흠 없는 본성을 되찾았습니다.

다음은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창세 3,12).

죄의 책임을 전가하면서 하와의 불순종이 드러납니다. 그녀 역시 뱀의 꾐에 넘어갔지요. 이 구차하고 누추한 발뺌의 행태는 누가 먼저냐의 문제라기보다 신뢰와 결속이 무너지는 죄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아마도 하느님께는 이 모습이 더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마리아께서 천사를 통해 하느님께 드렸던 응답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르심 앞에서 내린 어린 소녀의 이 순수한 결단은 원죄의 결과로 죄악에 물든 세상에 새 희망을 던집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드님을 모실 수 있도록하느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존재이십니다.


그녀는 거룩하고 흠 없는 태 안에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를 모시도록 준비된 새 하와이십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창세 3,20)를 넘어 모든 존재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아담의 불순종과 새 아담인 그리스도의 순종, 화와의 불순종과 새 하와인 마리아의 순종. 얼핏 대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신비로운 인과관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사도 바오로의 단언처럼, 스스로 범한 죄 때문에 시들어가는 인류를 두고 보실 수 없는 하느님께서 이 모두를 회복할 특단의 조치를 감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극단의 현실은 우리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고 또 매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몸, 같은 존재 안에 아담의 범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가지요. 또 하와의 불순종과 마리아의 순종 또한 나날이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죄와 은총, 어둠과 빛,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길을 찾아나가는 순례자에 비길 수 있습니다. 가망 없는 죄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의인도 못되는 가련한 실존을 입고 살아가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말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그래서 천사의 이 단언은 그날 마리아에게는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도 커다란 희망이 됩니다.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자체가, 엘리사벳의 늙은 나이의 잉태나 동정녀의 잉태 못지 않게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의 영역이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제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거룩하고 흠 없다"고 해 주시니, 우리는 부정하고 불결하고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잉태하고 품고 출산해 키우는 소명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와 함께 기뻐해도 좋습니다. 아니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한껏 기뻐하십시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