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4월 8일 성주간 수요일

dariaofs 2020. 4. 8. 05:47


파스카 성삼일을 목전에 둔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의 차이를 봅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를 들려 줍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는 분"(이사 50,4 참조)
"하느님은 아침마다 나를 일깨워 주시는 분"(이사 50,4 참조)
"하느님은 내 귀를 열어 주시는 분"(이사 50,4 참조)
"하느님은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사 50,7 참조)
"하느님은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사 50,8 참조)
"하느님은 나에게 가까이 계시는 분"(이사 50,8 참조)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힘은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알고 신뢰할 때 나옵니다. 세상이 나를 손가락질하고 등돌린다 해도 하느님께서 이를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으리라 믿기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마태 26,18)

제자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릴 준비를 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가오는 시간이 그리 호락호락, 만만하지 않다는 걸 그분은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꿋꿋이 뚜벅뚜벅 이 길을 걸어가실 수 있는 힘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마태 26,24).

그래서 예수님은 담담히 이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나를 괴롭히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그 상대에게 탓을 돌리지 않고, 하느님의 큰 그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 받아들이시는 겁니다.


설령 누가 내게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그 역시 우리 인생의 무대에서 악역을 맡았을 뿐이라 여긴다면 미움과 증오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마태 26,22).

한 제자가 당신을 배반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몹시 당황합니다. 아직까지는 분명히 결백한데 행여 앞으로라도 주님을 배반하게 될까봐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 배신자가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도, 자신에 대한 신뢰도 미약할 때 생깁니다.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마태 26,25).

같은 표현의 질문이지만 속뜻은 상이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흑시라도 제가 주님을 배반할까봐 두려워 여쭙지만, 유다는 제가 이미 저지른 일이 드러날까봐 두려워 짐짓 여쭙니다. 어쩌면 유다는 자신의 배반으로 스승의 뜻을 수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성자 예수님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파스카의 신비를 유다는 자기 지향과 야망과 탐욕의 도구로 재단하고 편집하려 합니다. 이는 하느님을 모르고 자신도 모를 때 범할 수 있는 큰 실수입니다.

"주님 은총의 때이옵니다.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화답송).

아버지를 알고 당신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 앞에서 결연히 고백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나의 때"(마태 26,18)는 과연 "은총의 때"입니다. 이 세상으로 은총을 끌어내리는 때요, 세상이 구원의 은총을 회복하는 때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실존과 삶의 여정을 통해 주님 십자가의 길에 동행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알 때 그 길은 훨씬 수월해집니다.


십자가가 작아지고 가벼워져서 수월해지는 게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고 일깨워 주시고 귀를 열어 주시고 도와주시고 가까이 계시는 주님"을 알기에 수월해지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앞장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벗님! 본격적으로 주님의 파스카 여정에 합류하기 전에 하느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은총을 간절히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알고 가는 길과 모르고 가는 길은 다릅니다. 또 알 때의 무게와 모를 때의 무게도 다르지요. 이렇게 우리도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걸을 채비를 차립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