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4월 1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dariaofs 2020. 4. 10. 06:12



우리는 오늘 주님의 수난 속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나다"(요한 18,5).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가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자 그분께서 대답하십니다.


이 응답은 두 차례 반복되지요. 그 의미는 좁게 보면 단순히 "너희가 찾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나다"라는 뜻이 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고 모세에게 밝히신 하느님의 자기 계시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는 홀로 존재하시는 하느님께만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이기에 성자께서도 당신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은 옳습니다.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요한 18,6.8).

서슬 시퍼렇게 기세등등해서 찾던 이가 스스로 자기 신분을 밝히시는데 오히려 그들이 두려워합니다. "나다"라는 말씀 안에서 신비적 위엄과 장엄함이 풍겨나오기 때문일 겁니다.


다가올 험한 시간에 대해 체념이 아니라 직면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고통과 죽음을 당당히 직면하는 이에게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습니다.

"나는 아니오"(요한 18,17.25).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의연하고 진실된 예수님의 답변과 정반대입니다. 그는 자기 신원을 부정합니다.


예수님과 달리 베드로는 고통과 죽음을 직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운명과 추종자들의 몫에 대해 아직 깨닫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지요.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요한 18,28)

유다인들의 두려움입니다. 율법의 문자에 묶인 그들은 한 사람의 생명보다 율법이 정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더중요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고수하느라 새 계약의 빵이신 분께 사형선고를 내리지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새 빵과 포도주를 맛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요한 19,7).

유다인들이 주장하는 예수님의 죄목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성모독, 불경죄나 독성죄에 해당할 겁니다. 그런데 이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밝히신 까닭에 죽음을 겪으셔야 합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요한 19,23)

모욕과 조롱과 고난을 겪으신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리십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고통이 연장되는 이 잔혹한 십자가형의 이유를 제1독서의 예언자는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2,5)고 전합니다.


제2독서의 히브리서 저자는 "경외심"(히브 5,7)과 "순종"(히브 5,8)이라는 단어로 이 과정을 요약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요한 19,25)

다행히 예수님 곁에는 그분을 사랑하는 이들이 남아 있습니다. 기라성같은 제자들은 대부분 떠나고, 사랑하시는 제자와 여인들이 곁을 지킵니다.

성경 저자가 기록한 이름들 뒤로 저의 이름을 덧붙여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두려움과 송구스러움이 없지 않지만, 저 역시 그들 틈에서 사랑하는 분의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분이 겪고 계신 고통의 이유가 저라는 걸 알기에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지만 그래도 머무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수난의 길을 걷습니다. 성당에 갈 수 없어도, 혹 자가격리 중이어도, 심지어 병중에 있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적 참여가 어려운 현실이지만,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가 지닌 개인적 실존에 맞게 우리를 당신 십자가 곁으로 초대해 주십니다. 경외심과 순종으로 따릅시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