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을 "봄"에 비추어 가늠해 보도록 초대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수행 방식인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대해 말씀하시며, 사람들에게 영광 받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반복해 강조하십니다.
타인의 봄, 즉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며 바치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아무리 길게 바치고 많이 희사하고 철저히 절제해도 위선에 불과하다는 걸 가르쳐 주십니다.
사실 갈망하는 바가 곧 사랑하는 바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갈망하는 자가 동시에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어렵지요.
타인의 눈과 칭찬과 영광에 취하면 매사를 그들 평가에 맡기게 되고, 지향의 순수성보다 돌아오는 칭찬으로 자신의 가치를 매기게 됩니다. 이제 수행은 더 이상 수행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마태 6,4.6.17)
숨어서 드리는 기도, 남모르게 베푸는 자선, 드러내지 않는 단식은 아버지의 "봄", 그분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이고, 자선은 하느님 사랑이 흐르는 곳으로 동행함이며, 단식은 하느님을 더 담아 충만해지려는 자기 비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타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하느님과 나와의 내밀한 통교입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의 예언직 승계 장면입니다.
"스승님 영의 두 몫을 받게 해 주십시오"(2열왕 2,9).
엘리야가 떠나기 전 엘리사는 스승님 영의 두 몫을 청합니다. 이스라엘에는 맏아들이 다른 이들보다 두 배의 상속 재산을 받는 관습이 있지요. 이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인 엘리야의 영적 상속자로서의 권리를 달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대로 되겠지만"(2열왕 2,10).
엘리야는 "봄"을 조건으로 내겁니다. 엘리야가 주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 엘리사 본인과 주님께 달렸다는 의미 같습니다.
스승의 지상 여정 마지막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본인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맛볼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봄"은 곧 기도, 특별히 관상의 경지를 가리키지요.
"저는 결코 스승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2열왕 2,6).
그 "봄"의 첫째 조건입니다. 상대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사랑, 곁자리를 포기하지 않는 의지이고 열망입니다. 관상기도는 주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쟁취해 거기서 서로에게 친밀히 머무르는 기도입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2열왕 2,11).
"봄"의 둘째 조건은 이야기, 곧 말씀입니다. 이 중요한 순간 두 예언자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대해 성경에는 별 언급이 없지만 적어도 뒷담화나 심심풀이 한담은 아니었을 테지요.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염려와 자비, 말씀을 받아 전하는 예언자의 소명 등 그들은 더 뜨겁게 말씀 안을 걷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관상하는 이는 엠마오 제자들처럼 말씀이 닿으면 뜨겁게 타오릅니다.
"봄"의 셋째 조건은 함께 계속 동행하는 지속성입니다. 관상기도는 잘 되는 것 같으면 열렬히 바치다가 메마름이 오면 손을 놓는 일희일비의 감정놀이가 아닙니다.
은총의 희락에 젖을 때나 주님 부재의 무미건조함 속에서도 다름없이 꾸준하고 항구히 동행합니다. 그래서 그는 골방이나 외딴곳을 더욱 사랑합니다. 하느님과 머무르는 충만한 고독을 찾아다니지요.
관상하는 이는 하느님의 시선 앞에 자신을 두고, 타인의 시선은 물론 자기 자신의 시선에서도 자유롭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봄" 앞에 머물러 그분을 봅니다. 사람이 주는 영광과 칭송이 더 이상 그에게 매력이 되지 못하듯, 사람의 비난과 공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숨어계시는 아버지를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이미 그분은 우리를 보고 계시니 우리는 그분 시선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분 눈에 비치고 그분 마음에 들면 족합니다.
그 자체가 그분 사랑 안을 헤엄치는 것이니까요. 사람에게서 오는 대가성 위안들은 사도 바오로의 표현처럼 "쓰레기"(필리 3,8 참조)에 불과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과 나만의 내밀하고 은밀한 골방에서 그 "봄"에 취하고 그 사랑에 취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그 골방에서 사랑이 되어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것으로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진답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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