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dariaofs 2020. 6. 26. 05:39

오늘 미사의 말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 "우리의 병고를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신"(복음 환호송 참조) 예수님을 투영합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나병에 걸린 이가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말합니다.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던 시대에 나병(한센병)은 가뜩이나 고통스런 환자를 소외와 고립의 처지로 내모는 형벌과도 같았지요

그런데 이 환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보십시오. 그의 표현은 단순하지만 깊은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하고자 하는" 의지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원하시고 바라시는 자체가 곧 이루어짐입니다. 창조 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의지는 사랑의 의지이고 그 사랑은 멈추거나 고착되지 않고 움직입니다. 환자는 이를 알기에 예수님께,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낫게 하실 수 있다고 일깨워 드립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태 8,3).

예수님은 누구보다 환자의 고통과 슬픔을 알고 연민하시기에 기꺼이 당신의 원의, 바람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정말, 뱃속 저 깊이에서부터 그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 바람과 말씀은 세상 창조 때, "빛이 생겨라"(창세 1,3) 하셨던 하느님 말씀과 맥을 같이하는 창조의 선포입니다.

예수님이 그 환자의 치유를 기꺼이, 적극적으로 바라신 것은 그의 병고를 당신이 모두 짊어지시려는 마음에서였고 또 그에게서 당신을 보셨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 모든 죄악과 질병 고통을 짊어지실 모습을 일찌기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지요. "사람들에게서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 53,3-4).

제1독서에서도 차마 읽어내려가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한 형벌을 당하는 한 인물, 치드키야가 등장합니다. 치드키야는 바빌론 임금이 유다 임금 여호야킨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면서 세운 유다의 임금이지요.

유다 임금인 그는 호위군사에게 버림받고 바빌론 임금에게 끌려가, 아들들의 죽음을 목도한 뒤 두 눈마저 빼앗깁니다. 그러고는 청동 사슬에 묶여 바빌론으로 끌려가지요.

그뿐입니까? 예루살렘은 적에게 철저히 유린당합니다. "주님의 집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은 불태워지고 성벽은 허물어"(2열왕 25,9-10 참조) 지지요. 하느님의 신부인 예루살렘 역시 오늘 말씀 속의 인물들처럼 비참한 처지에 이릅니다.

"치드키야는 ...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당신 앞에서 쫓아내셨다"(2열왕 24,19-20).

성경 저자는 유다 왕국의 멸망에 대해 이렇게 신학적 성찰을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치드키야와 예루살렘은 (예루살렘이 의인화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죄로 무너진 것이지요.

반면 예수님은 자진해서 스스로 백성의 죄를 떠안고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자기 죄로 멸망하는 이와 주님의 종 메시아 사이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늘의 말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련한 나병 환자, 그의 허물어진 육신과 고통은 당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자기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요(요한 9,3 참조).

 

우리가 감히 이해한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되는 고통의 시기를 거쳤지만, 그의 치유와 회복은 이스라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증거가"(마태 8,4) 될 것이니까요.

이 인생의 순례 여정에서 우리는 누구도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관계적, 공동체적으로 통제와 조절이 불가능한 고통에 압도되는 힘든 시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고통 한가운데 있을 때는 수긍하기 어렵지만, 분명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존재하고 의미가 있지요. 예수님은 그 고통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전환해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덕분에 고통도 존엄성을 얻게 되었지요.

"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마태 8,3).

이 말씀은 "...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들립니다. 희망의 서광이고 회복과 새 창조의 서막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일부 남겨 포도밭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2열왕 25,12).

그 어둡고 황폐한 도륙의 시간 끝에도 희망의 싹은 남겨집니다. 한다한 이들, 재능과 기술이 출중한 이들은 거의 대부분 바빌론으로 끌려가고, 어디에도 끼지 못한 그저 단순하고 소박하며 별 쓸모없이 가난한 이들이 유다 땅에 남겨지지요.

 

하느님께서 이 가난한 이들을 통해 예루살렘을 재건하시리라는 희망은, 새 예루살렘을 고대하는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도 영적 희망을 선사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말씀 안에서 만난 고통에서, 또 그 고통을 통해 떠오른 나의 고통에서 오히려 새 희망의 불씨를 뒤적여 찾아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앞서 가시니 힘을 내고 용기도 내어 봅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우리 안에도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처럼 차린 새 예루살렘"(묵시 21,2 참조)이 깃들어 있답니다. 오늘 저의 기도 지향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 특히 나환우들입니다. 그들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시길 빕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