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0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dariaofs 2020. 9. 26. 13:49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너희는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영광의 순간에 마치 찬물을 끼얹으시는 듯합니다.

"귀담아들어라."


제자들이 당신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들립니다. 스승의 능력과 명성에 기대어 승승장구하리라는 제자들의 욕망을 염려하시는 듯합니다. 진정한 메시아의 업적은 한갓 인간의 찬사나 호평에 있지 않고,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간에 있다는 걸 반복해 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9,45)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모릅니다. 물리적인 귀는 열려있지만 마음은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저 지금의 영광이 계속 쭉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지요. 이대로라면 이스라엘의 자유와 해방은 물론 자기들의 입지도 탄탄히 보장될 것으로 보입니다. 성공으로 들뜬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갈 틈이 좀처럼 생기지 않습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루카 9,45)


하지만 복음사가는 무지의 탓을 온전히 제자들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의 무지한 상태조차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한낱 인간이 알아낼 재간은 없으니까요. 주님께서 그 뜻을 감추셨다면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직 그들이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루카 9,45)


제자들은 지금 스승의 놀라운 가르침과 기적에 들떠 있기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불안의 진동을 미세하게나마 감지를 하기 시작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뭘까요?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 묻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을, 답을 두려워할까요?

사람은 무언가를 갈망하면서 나름 소신과 신념을 가지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실존적 불안을 완전히 떨쳐내기는 어렵습니다. 그 불안에 얼만큼 관심을 기울이느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불안이 수면 위로 드러나거나 그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지요. 뭔가 자기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은 미세한 불안을 일으킵니다. 이는 어쩌면 한치 앞도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숙명같은 실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허무를 외치는 코헬렛 저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코헬 12,6)


오늘의 대목에서는 "주님을 기억하라."는 권고가 자주 반복됩니다. 말하자면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 찬란한 젊음의 때에, 무사태평 아무 걱정 없을 때에, 행복에 겨울 때에, 누리고 즐길 때에, 힘과 재물이 넘칠 때에, 세상 부러울 것 없을 때에, 잠시 멈추고 피조물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시는 분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이 기억은 인간이 자신의 허무와 약함을 인정하고 삼가며 옷깃을 여미게 해 줍니다. 창조주 앞에 선 자신의 보잘것없는 실존을 깨닫게 되니까요.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코헬 12,7)


이것이 기억해야 하고 삼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직까지 모든 인간에게 공정하고 평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니까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과학적 의학적 연구와 시도가 있고 죽음을 겪기까지 받는 돌봄에 질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예외없는 현실입니다. 죽음은 재산, 성별, 학식, 신분, 인종에 상관 없이 모두에게 동등한 미래입니다. 그러니 지금 행복의 순간을 지나고 있건, 고통의 때를 지나고 있건 우리 모두가 "죽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세상도 좀 더 겸허해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지금 당장 제자들을 깨우치거나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언젠가 그들이 무릎을 치며 하느님 계획을 깨닫게 된 단초가 되었기에 복음서가 이를 기록한 것이지요. 훗날 스승의 수난 예고가 현실이 되었을 때, 이 기억은 그들에게 놀람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가 결국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온전한 순종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죽음이 나 아닌 타자에게 달려 있다는 인식이 자칫 허무주의를 낳기도 하지만, 바로 그 타자이신 절대자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내어맡기는 신앙으로 승화될 수도 있습니다. 이 신앙은 더 견고한 희망이 되고 더 열렬한 사랑이 됩니다. 축배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고, 나를 위한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한뼘씩 더 자라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떤 처지에서나 주인이신 분을 기억합시다. 그분의 영광과 더불어, 그분의 눈물과 고통과 죽음도 떠올립시다. 이 기억 안에는 이 험난한 지상 순례길을 인내하며 견딜 수 있는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쥐고 계신 분 앞에서 겸허히 삼가며 온전히 의탁하며 나아갑시다. 오늘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벗님을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