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과 찬양의 연관성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 대목에는 여러 관전 포인트가 숨어 있습니다. 지붕까지 올라가 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보낸 이웃들의 헌신과 믿음, 용서의 권한, 치유와 용서의 연관성,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의심 등등 그런데 오늘 말씀은 제게 치유된 이의 태도를 더 확대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당시 병을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병에 걸린 것도 힘든데, 거기에 더해 죄인이라는 주홍글씨까지 떠안아야 했지요. 환자에게는 병으로 인한 고통에 부끄러움이라는 가중처벌까지 주어진 것이니 참 안타깝지요.
중풍에 걸려 고통 받던 그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님 말씀이 참 놀랍고 감사했을 터입니다.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원래의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마음 속에서 일기 시작합니다. 이 희망의 실현은 그리 머지 않은 듯 보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루카 5,24)
기대에 찬 그의 앞에서 잠시 신학적 논쟁이 오갑니다. 소위 배운 이들, 제도와 학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의 불편한 마음을 예수님께서 알아차리신 것입니다.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인듯 하네요. 하지만 병자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자신의 죄가 사해진다면 곧 이 지긋지긋한 병마도 떨어지게 될 것이니까요. 그런 일은 하느님의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분을 그저 믿으면 됩니다.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5)
그는 죄의 용서와 육신의 치유, 모든 것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그분은 별로 개의치 않으시는 듯 보입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치유된 이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느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평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지요. 찬양은 명령한다고 튀어나오는 태도가 아닙니다. 감사와 찬미가 내면에서 솟구쳐 오를 때 흘러나오는 기도가 찬양입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할 때, 누가 권하지 않다도 기쁨에 찬 찬양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기도를 무척 좋아하십니다. '내 마음을, 내 사랑을 네가 알아들었구나. 용서와 구원을 깨달았구나.' 하시며 어린아이처럼 흡족해하실 겁니다.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대목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 환호와 환성이 가득합니다. 구원의 날, 모든 피조물이 주님 앞에서 흥겨워하며 한껏 행복을 누리리라는 예언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우리의 입꼬리까지 살며시 올라갈 정도로 생기와 축복이 넘치는 광경이지요.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이사 35,9)
온갖 질병과 장애로 고통 받던 이들이 치유되고, 사막과 광야는 꽃을 피웁니다. 무너져가던 이들이 힘을 얻고 해를 끼치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거룩한 길"(이사 35,8)에는 구원받은 이들과 해방된 이들만 들어서서 걷는다고 하십니다. 육신의 치유와 생명이 구원으로까지 이어진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빈곤과 억압에서 벗어났다고, 곤란한 지경에서 빠져나왔다고, 앓던 질병이 떨어져 나갔다고 모두가 다 구원자 하느님을 떠올리며 감사와 찬양을 올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리적이고 환경적인 곤란의 해소가 구원이 되려면, 곧 주님의 거룩한 길에 들어서려면 이 일을 베푸신 주권자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게 첫째입니다. 이 감사와 찬양은 하느님께 이득이 되는 게 아니라, 바치는 이에게 구원을 각인시켜 주지요.
그래서 구원받은 이는 찬양을 멈추지 않고, 찬양하는 이는 구원받은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찬양은 강요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지만, 구원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치유받은 중풍병자처럼, 신기한 일을 보고 놀란 군중처럼 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는 우리가 앓는 내외적 고통과 결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싶어하십니다. 문제는 이를 구원으로 연결시키는 우리의 능력이지요. '나는 구원받은 존재인가?' 의문이 든다면, 내가 감사하고 찬양하는 사람인지를 성찰해 보면 좋을 듯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고 찬양하는 능력이 출중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는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고 경탄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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