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주님 수난 예식의 말씀에는 온 몸으로 고백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제1독서 대목인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는 예수님이 겪으신 수난의 의미와 이유를 풀어 줍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2,5)
예언자는 온갖 수모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주님의 종의 모습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분 고난의 이유는 당신 자신의 잘못에 있지 않고 오로지 "우리" 때문입니다.
그분이 그토록 간절히 바란 것, 당신 목숨을 내놓고라도 지켜 주려 하신 것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 '자기다움'에 충만하고 온전히 머무르는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안에 보석처럼 감추어진 하느님의 모상은 죄의 상처와 악의 유혹으로 훼손되고 오염되어 평화를 잃어버렸지요. 예수님은 이를 새로이 창조하러 오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죽음에 던지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를 병들게 하는 모든 죄악에 대해 승리를 선포하십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의 순종과 구원의 관계를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4,8-9)
이 순종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자께서 아버지께 보이신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표현이 그분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수님도 당신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보증이 되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의 임금은 황제뿐이오."(요한 19,15)
우리의 평화를 위해 당신을 바치시는 분 앞에서 그분 백성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주님의 백성은 예수님을 이방인 손에 넘겨 죽음으로 내몰아갑니다. 그리고는 외치지요. 우리는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이방 민족의 통치자의 백성이라고요!
이스라엘이 수세기를 걸쳐 유지해 온 하느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이토록 쉽게 부서지는 신기루였음이 마음 아픕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이 외침에서 자유롭지 못하지요. 우리 역시 돈이나 권력, 안전지대 같은 우상이 우리의 주인이라고 암묵적으로 외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요한 19,38)
수난복음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오늘은 특히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눈에 띕니다. 며칠 전 마르코 복음의 수난기에서는 그가 "당당히 들어가 청하였다"고 했지요.(마르 15,43 참조) 유다인들이 두려워서 숨기던 신념을 오히려 스승의 처절한 실패 앞에서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추락과 몰락의 현실이 유다인 눈으로는 조롱거리일 뿐이지만, 신앙의 눈으로는 더할 수 없는 사랑의 증거니까요. 무죄하신 분이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면서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우리를 향해 소리 없이 외치고 계십니다. "이만-------큼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의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6-7)
이 아가의 노래처럼, 성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온 몸을 던져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신 날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결행하신 그 사랑은, 사랑이 죽음보다 강함을 증거합니다. 이 사랑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빼앗긴 성목요일에 이어, 그분을 잃은 오늘은 참 서럽고 힘든 날입니다.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그리워하는 성토요일 역시 갈 곳을 잃은 공허함으로 헛헛하기만 하고요.
사랑하는 벗님! 이 진한 슬픔의 시간을 건너면서, 우리, 이것 하나만은 잊지 맙시다. 이 모든 게 "이만-------큼 너를 사랑한다"는 그분의 진심어린 고백이라는 것을요.
주님이신 분이 죽기까지 사랑하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복된 성삼일 여정 되시길 기원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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