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례 상 식

<전례와 삶> 7. 동료적 유대감이 미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dariaofs 2013. 5. 18. 22:05

 

 

 

전례적 집회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목적 자체는 아니다.

 

전례에서의 표징적인 사건은 ‘삶의 전례’를 지향하고 있다. 그때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형제애의 연관성이 문제가 된다.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중 계명을 ‘대헌장’(Magna Charta)으로, 그리스도교적 삶의 근본 법칙이라고 칭할 수 있다.

 

하느님께로 연관 짓는 행위와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은 전례의 본질에 속한다. 이렇게 양극을 이루는 가운데, 어느 하나에 치중하여 긴장 상태가 해체되면 전례는 뿌리째 파괴되고 만다.

 

전례에서는 하느님과의 만남이 말씀과 표징 안에서 이루어지고, 일상적으로 인간은 직장, 가정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여러 가지 일들과 마주치게 된다.

 

이 양쪽이 합쳐져 전체를 이루며 서로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매일 매일의 노동과 축제가 분리될 수 없지만 구분되어야 하듯이 이 양자도 서로 구분된다.

 

가톨릭 신자들은 종종 이중적으로 살고 있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가톨릭 신자들은 일상적 삶에서는 별로 티를 안 내보이면서 주일의 종교 행위는 실천한다고 한다. 그런 단편적인 판단은 분명 사실과 들어맞지 않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례도 그저 단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읽혀진’ 것이 아니다. 종종 성체를 영하는 것보다도 성체를 숭배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할지라도 전례는 신자들이 강건하게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다.

 

전례의 개혁이 교회의 전체 삶의 개혁의 한 부분이 아니라면 전례 개혁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이 알려지는데, 그것은 곧 “너희가 서로 사랑”한다는 표징을 통해서이다(요한 13,35).

 

전례가 공동체에 대한 권고와 요청으로 이해될 때, 그럴 때만 전례 예식은 의미를 지니게 되고, 정말 그럴 때만 책임을 완수하게 되며 하느님의 심판대 아래 서지 않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이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은 누구라 자신의 이웃에게 다가가서 이웃을 맞아들이고, 형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며,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근심을 함께하여 그를 위하여 기도하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를 존중하며,

 

모임의 새로운 식구를 받아들이고, 낯선 사람에게 고향을 제공해주면서 따뜻하게 후대하고, 서로 즐거워하며, 고통당하는 사람의 편에 서서 서로 상대방에게 영광을 돌리게 된다.

 

성령 안에서는 다른 사람의 믿음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 성령 안에서는 ‘그것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성령 안에서는 선(善)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인지하게 된다.”(Gotthard Richter)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애의 첫 번째 결실로서 하느님 앞에서의 평온한 마음을 얻게 된다.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20) 형제애의 두 번째 결실은 기도를 통한 청원을 들어 허락하심이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1요한 3,22)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면, 그러한 영이 우리 공동체 안에 지배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우리의 끊임없는 언약을 잘 알면서―최후의 심판 날에 너의 형제는 어디에 있느냐는 주님의 물으심,

 

즉 우리의 구원 여부가 달려 있는 이 물으심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공동체 무리가 가리키면서, “주님 저의 자매들과 형제들이 여기 있습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당신께로 가는 길을 찾았으며, 이들과 함께 당신의 은총을 통해서 그 길을 발견했습니다.” 하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약의 복음은 공동체 예식에서의 복음 선포를 토대로 한 이웃을 위한 봉사에 관한 증언들로 가득 차 있다. 봉사(Diakonia)는 “성찬례적인 주님과 형제와의 만찬에 가시적인 사랑의 표지를 덧붙인다(말하자면 신뢰할 수 있음을 드러냄).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원래 친교를 위한 음식 나눔(Agape)를 폐지한 후에도 자선 사업을 통해서 그 표지의 명백성을 알리는 데 기여했고, 오늘날은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드러내는 데에 기여해야 한다. ⋯⋯

 

사람들은 ‘구체적인 것’ 즉 이웃에 대한 희생적이고 개인적인 자선 활동 내지는 봉사 활동에 헌신하지 않으면서, 또 봉사 활동들의 단일한 일치성을 보지 못하면서,

 

복음의 선포와 전례라는 ‘추상적인 것’에 너무도 쉽게 머물러 있다.”(Paul Nordhues) 이것은 생생한 공동체 미사와 사회적 투신 사이의 상호 관계로 보인다.

 

나치 시대에 융만(Josef Andreas Jungmann)은, “사회적인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개인주의가 우선적으로 지배하는 시대는 전례에다가도, 전례의 상징들과 형식들에다가도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적인 사실”로 들고 있다.

 

폴란드 가톨릭 주간지 Tygodnik Powszechny의 여류 대표 편집장인 Jozefa Hennelova는 모든 교구 단체에 부과된 당연한 의무인 성찬례를 거행하는 교구 단체들이. “비대중적인 행위임에도 도덕적 원천에 근거하여 깨어지지 않는 신앙 전통의 가치를 고백하는 몇몇 사람보다 더 용기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일반적으로 볼 때, 우리는 여전히 너무나도 큰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이에 대한 한 예로, 우리가 평화의 인사 같은 표징적 행위를 적극적으로 실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미사는 오늘날 증거와 전례와 봉사(참조: 4장)의 결합을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전례를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으로”(SC 10) 인식케 하는 가능성을 충분히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