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례 상 식

<전례와 삶> 10. 전례에서 성령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dariaofs 2013. 5. 23. 06:15

 

 

전례에 있어서 하느님 영의 중요성은 이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부터 굉장히 중시했는데, 이는 아무리 높게 평가되어도 충분치 않다.

 

특히 바오로와 요한에게 있어서 일종의 도식이 발견되는데(참조: 7장), 이것은 오늘날 성찬례의 감사기도 마지막 찬미 부분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따라서 성령은 전례 신학적으로 비가시적인 전례의 거행자에 속하며, 전례는 참으로 하느님의 영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며 완성될 수 있다.

 

성령 안에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정말 결코 “아버지”(로마 8,15)라고, “예수님은 주님이시다.”(1코린 12,3)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 있는 당신의 공동체처럼 전례적으로 활동하신다.

 

그래서 3세기에 히폴리토는 전례적인 집회를 성령의 불꽃이 만개하는 장소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 공동체에도 해당되는 것일까?

 

소집단으로 행해지는, 혹은 수십 년 전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처럼 4만 명이 참여하는 집회로 행해지는 카리스마적(은사적)인 전례 예식들은, 전례와 성령의 결합이 그리 문제가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제시해준다.

 

그때 추구하고―전승되어 내려오는 많은 공동체 예식들과는 분명히 구별되게― 체험되는 것을 바오로 6세는 언젠가 이렇게 기술하였다. “교회와 세계는 이전보다도 더, 성령 강림 대축일의 기적이 역사 안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점점 더 세속화되고 있는 세계는 오늘날이 ‘종교적 개혁’의 증언을 필요로 한다. 이 개혁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사람들 서로 간의 깊은 결속감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들 각자가 자유롭게 표현하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불러일으키고 지지해주고 결실 맺게 해주게 되는 공동의 기도 예식들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는 체험, 즉 하느님 없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느님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살아 있는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감사하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도처에서 또한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께서 성취하시는 위대한 행위들을 기리는 것은 당연한 요청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미 성취된 전례의 개혁을 넘어서 새로운 전례 예식이 필요하다면 우리의 전례에는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개인적 사건에서 비롯된 신앙의 증언, 신앙과 체험 간의,

 

그리고 표징적인 전례 행위와 사회적 행동 간의 벌어진 간격을 메워 연결하는 것, 감각적으로 체험 가능한 성령의 현존, 공동체 안에서의 카리스마(은사)의 펼침과 제시, 이 모든 것이 전례에 대한 요구에 준하는 상태에서 펼쳐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양상들이기 때문이다.

 

전례 운동을 통한 개진 후 몇십 년이 채 안 지난 지금, 또한 전례의 개혁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우리의 전례 예식들은 제2차 전례의 개혁이 필요한 정도로 좌초된 상태인가, 규정들로 인해 중요한 핵심이 빠져 있는 상태인가?

 

전례에서 영의 작용에다 확실히 더 큰 공간을 마련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용이 ‘만들어질’ 수는 없다. 우리의 전례 예식들 안에서 너무나도 자주 비치는 열심하지 못한 태도는 새로운 하느님 체험을 통해 극복되어야 한다.

 

그것은 뚜렷한 목표 의식을 지닌 전례 교육이라는 전제하에서 가능하다.

 

전례 예식에 관한, 그리고 그 합법성에 관한 신학 지식은, 규정들에 대한 구속이 지나쳐 경직성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앞선 세대와 오늘날 온 세계 그리스도인을 포괄하는 공동 사회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자의적 주관 없이, 보다 자유롭게 하느님과 통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분명 전례에도 이런 말씀이 적용될 것이다: “영은 생명을 준다.”(요한 6,63)

 

그런데 미사의 순서에서―공동체의 인사에서부터 마침 강복 기도까지―하느님의 영이 불러내어지지 않는, 아니면 적어도 언급되지 않는 요소는 거의 없다. 새로워진 성사 예식들에서는 성령의 작용이 전보다도 더욱 강조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강복 기도들과 축성 기도들에 적용되는데, 이 기도들은 매 성사 예식의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신앙 내용들을 표현해 주며,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결코 빠지지 않게 된다.

 

이제부터 매 예식의 핵심에 속하게 되는 이 기도는, 성찬례의 감사기도에서 감사하면서 간주하는 특성과 같은 구조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간청을 포함하고 있다.

 

세례에 있어서 이것은 세례수 축복 기도이고, 견진 성사에 있어서는 주교가 견진 성사자 위로 두 손을 펼치면서 말하는 성령을 아래로 불러 내리는 기도문이며,

 

고해 성사에 있어서는 사죄에 따라오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이고, 집전자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사제 서품식 때 하는 기도들이며, 병자에게 성유를 바르는 도유식에서는 기름 축성을 위한 기도인데, 이 기도는 이미 축성된 기름이 사용되는 그런 때에도 찬미와 감사의 기도로서 바쳐진다.

 

이것은 정말 성사들처럼 주일의 전례 예식에도 베풀어져 실행될 수 있는 모든 준성사적인 것들과 축복들에도 행하여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것은 새로 창안된 감사 기도문들에 적용된다.

 

 예물(즉 빵과 포도주) 위에 성령을 불러내는 「축성 기원문」(성령 청원 기도: Epiclesis)과, 성령 안에서 신자들의 변화를 위한 하느님을 향한 외침 그리고 이것들이 서로 섞여서 표현되는 양상 「일치 기원문」이 그것이다. 이 공동의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체가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례 예식 안에서 성령의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예들은 손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예들이, 전례에서 어느 공간이 실제로 하느님 영의 권한에 귀속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은 별로 없다.

 

 교회의 전례를 비판적으로 관찰하는 사람은, 교회가 하느님 영을 살아서 활동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전례문들과 전례 규정들 속에다 숨겨 놓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참조: 20-22장).

 

따라서 미사에도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본기도의 청원을 적용시킨다. “주님, 성령의 은혜를 온 세상에 내려주시고 복음 전파 시초에 베푸신 그 은혜를 오늘도,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