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독일 방문 당시, 독일 교회가 전송한 보도 자료 가운데 전례에 관한 문건이 있었다.
그 문건을 통해 “많은 사제들, 평신도들, 교회 음악가들, 종교 교육자들, 신학 교수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교와 상당히 밀접한 대학생들이 거의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전례 지식에 대한 부족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문건은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실망스러운 어조로 계속해서 “성직자들과 하느님 백성들의 정신 상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 요청은 전례 개혁 운동의 발상지 중의 하나인 독일에서도 세기의 과제”로 남아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전례 개혁의 여파로 새로운 전례서들과 예식들이 규정되어 1960~70년대에 도처에 널리 확산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를 순종적 자세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 개혁의 정신과 신학적 배경과 교회사에 있어 한 번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개혁 작업이 왜 실시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는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문제의 원인은 교회 공동체의 반발 같은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결핍된 전례 지식에 있다.
독일 주교회의는 이러한 상황을 염려하여 ‘전례의 날’을 거행하였는데, 그것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인식되었다: “심성(心性) 누름 단추가 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명령하면 그것은 바로 작동한다. 이것은 기술적인 영역에서는 가능하다.
전례의 ‘기술적인’ 영역에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적인 진행 과정에서 문제가 된다. 교회의 개혁 그리고 전례의 개혁은 하나의 과정이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수 세대 동안 지속된 점진적인 수용 작업이 이어졌던 것이다.”(Rupert Berger)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전례 헌장」 이후 오늘날 전례 형식은 무게를 떠받칠 충분한 토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망각한 웅장한 구조물처럼 보인다. 이 구조물이 위험에 처하지 않으려면 즉시 그 기반이 되는 토대가 추가로 보강되어야 한다. 즉 ‘전례 지식 함양’이라는 힘겨운 토대 보강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이러한 현상을 직접적으로 예견한 장본인이자 전례 운동의 원로인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의 주장이 떠오른다. “이 시점에서 전례 교육의 본래적 임무가 다뤄지지 않는다면 예식과 전례문의 개혁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 그것은 순수한 신실함을 중히 여기는 독실한 신자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느낌, 즉 ‘이전에는 전례를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이 미리 기도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전례 전에 떠들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라고 말한 노(老)신부의 일갈이 의미하는 것과 같은 그런 불행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오늘날 여기저기에서 다시 ‘말없는 미사’(Stillmesse)가 요구되는 현상은 전례 지식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요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교육받았던 신자들 가운데 일부가 보이는 신앙 태도로서, 과르디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자에게 있어 종교적 태도란 그저 단순히 개인적이고 내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로 인해 전례적 행동의 의미가 상실되었다. 왜냐하면 그 신자가 수행한 것은 본래적 의미에서의 전례 행위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그 신자는 전례 예식으로 인해 자신이 방해받고 있다는 생각까지 종종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전례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일까?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많은 신부들이, 이것은 정말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든가, 아니면 ‘객관적인’ 전례 집행으로 충분하며 전례에의 참여와 전 공동체의 이해라는 측면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례 교육은 과연 어디에서 행해질 수 있을까? 세속화된 세상에서의 종교 수업은 이것을 거의 수행할 수 없다. 특수한 교육 개최나 공동체의 밤 모임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여기에 나올 사람은 분명 몇 명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전례 자체는 남아 있게 된다. 1999년에 개정된 새로운 「로마 미사 전례서 총지침」 65항은 강론이란 “거행되는 신비의 특성이나 회중의 특별한 입장도 고려하면서 행해지는 그날 미사의 고유 전례문의 본문에 대한 설명이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아마도 전례 예식 안에서 반복적인 특수한 설명을 통해 전례문들과 예식들에 대한 이해를 도모케 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이해력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상황을 참작하여 전례를 수행하는 것도 그 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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