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례 상 식

<전례와 삶> 17. 전례에 보다 큰 경외심이?

dariaofs 2013. 6. 5. 10:33

적잖은 수의 전례 참여자들은 전례의 새로운 정렬(조직화)이 경외심을 위축시키는 양상을 띤다고 호소하고 있다.

 

과도한 경외심에서 생겨난, 전부터 널리 퍼져 있던 사제들의 경연적(硬軟的) 태도와 소심성도 태만함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미사의 성찬의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이 음식값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편안하게 성찬에 초대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고 그들은 한탄하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 죄와 책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영성체를 드물게만 허용했던 전례 예식과는 달리, 이젠 통제되지 않고 ‘검사되지 않은’ 채로 성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공동체 내에 모든 영역에서 경외심이 총체적으로 감소되었다는 사실이 전례 안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경외심이라는 것은 순전히 사전적인 의미에서 보면 “인간이 절대자인 신 앞에서 느끼게 되는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이 감정은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그렇게 명백한 정도로 존재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주일에 모인 공동체를 관찰해 보면 실제로 그 구성원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즉 전보다 더 자발적으로 더 바르게 행동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는 적어도 전보다 덜 두려워하고 덜 주저하면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곧 공동체가 전보다 경외심이 덜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한테 당신(존칭 Sie)이나 그분(존칭 Er)이라는 호칭으로 말을 걸어야 했던 상황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오늘날은 이미 아들이 아버지에게 호의를 표현할 때 아버지의 어깨를 두드리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어깨를 두드리는 행위가 항상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경외심이 전보다 덜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그저 외적인 형식들이 변화되었을 뿐이고, 자녀들과 부모의 관계가 전보다 더 자연스러워져서 오히려 진정으로 더 친밀해진 것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이러한 상황은 전례에도 해당되는 것이 아닐는지? 만약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단지 하느님으로서 거의 성체 현시 안에서만 은폐되어 신자들을 마주하셨다면 오늘날과는 다른 형태 들이 전례에 필부 불가결한 요소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은 이제 더 이상은 성찬의 형상 안에서만 보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참조: 7장).

 

“따라서 경외심은 단지 전능하신 분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인 공동체에 사제가 경의를 표하는 가운데서도, 또 사제의 말씀을 통해서도, 그리고 찬송의 방법과 방식 안에서도 나타나고, 일반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건을 공경하는 데서, 그 영광을 위격으로 돌리는 태도 안에서 나타난다.”(A.Adam․R.Berger)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례는 신비를 강조했고, 따라서 숨겨져 있는 거룩한 하느님의 형상을 그려 내었다.

 

그러나 수직 관계, 즉 하느님 대 인간이라는 관계가 전면에 놓여 있었다. 전례의 개혁은 이 시각에다 수평 관계, 즉 인간 대 인간이라는 관계를 전례 안에 첨가시켰다(참조: 4장).

 

수직 관계와 수평 관계는 서로 대립되지 않고 서로 보완된다. 그러나 교회가 단지 하느님의 집일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집이기도 하다면 공경의 형식들은 변화될 필요가 있다.

 

이때는 물론 우리가 하나의 극단(極端)에서 또 다른 하나의 극단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