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는 교회의 상징적 의미만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현실도 드러내는 까닭에 전례가 전체 교회적 삶의 투영이라고 본다면(참조: 4장과 18장), 전례는 불가피하게 교회 내에서의 실제적인 상황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진심으로 교회의 혁신을 성취시키려고 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 생활을 나날이 발전시키고, 변경할 수 있는 그 제도들을 우리 시대의 요구에 더 잘 적응”시키려는 목표를 위해 매진했었다(SC 1).
이 거대한 전체 교회적인 개혁이 우선적으로 전례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때 교회에 대한 규정이 완전히 새롭게 강조되었다.
이 새로운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신학적 배경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평신도들은 교회를 통해서 거룩하게 되도록 부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교회이고, 교회의 고귀한 행위인 전례의 거행자이다(참조: 7장).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전례 안에서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들을 성취할 때, 그럴 때에만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들을 성취할 수 있다(참조: 9장).
그래서 바로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신학적 배경, 즉 교회에 대한 이해의 측면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에 근본적인 전환들이 이루어졌다.
“교회의 중요한 특징에 비추어 교회론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적 학설과 하느님 중심적 학설 그리고 성령 중심적 학설. 이 세 유형들은 각기 그때그때마다 신학적 이론을 보다 강하게 하느님 중심으로 펼친다든가 아니면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한다든가 아니면 보다 강력하게 성령의 작용의 관점에서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Adolf Exeler)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에 대한 신학적 학설의 틀 안에서 교회는 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일컬어진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동일하게 여겨질 정도로 강력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다.
계속 살아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로서의 교회. 따라서 교회는 신비(체)로 이해된다. 이것은 20세기 전반 동안의 신학적 진전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결점도 있다. 교회가, 교회의 끊임없는 개혁의 필요성이 뒷전에 놓일 정도로,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교회를, 즉 그리스도를 비판할 수 있었단 말인가?
하느님 중심의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신학적 학설의 틀 안에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칭하는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시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뿐만 아니라 이 둘 사이의 구분도, 그리고 교회의 끊임없는 개혁의 요구도 야기될 수 있다.
숭고한 주님과 순례하는, 죄를 범하기 쉬운 하느님 백성 간의 구별의 강조는 끊임없는 새로운 방향 설정의 필요성을 유발한다. “이때 제기되는 교회에 대한 비판은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표시일 수 있다.”(Adolf Exeler)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등장한 성령에 관한 신학적 학설의 틀 안에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령에 의해 움직여지는 행위로 이해된다(참조: 8장).
따라서 제도적인 요소들 대신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강조된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 있는 공동체;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개혁의 힘; 모든 신자 각자가 전 인류의 계도를 위해서 성령으로부터 부여받게 되는 재능들.
이때 성삼위는 서로 반목되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바로 성부의 영이자 성자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론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의 시각과 하느님 중심적인 교회의 시각을 배척하지 않는다.
성령론은 다른 두 학설을 학제 없이 수렴할 수 있다.”(Adolf Exeler)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교회의 다른 모습을 이끌어낸다.
제도적 요소들은, 이것들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이젠 오히려 2순위가 된다. 거대한 조직은 그리 강조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의 시급한 현실화와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가 강조된다.
따라서 분명히 전체 교회를 위한 마음이 배제되지는 않지만, 하느님 영의 권능에 자신이 의존하고 있다고 공통되게 믿는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공동체의 구성원들 간의 새로운 관계가 생겨난다.
이것은 자명하게 전례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한다. 우리가 교회를 우선적으로 확정된 제도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분류된 공동체로 본다면, 그렇다면 확정된, 위에서부터 정렬된 전례 예식이 이해의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보다 단호하게, 교회를 성령에 의해 부름 받은 많은 교구들의 공동체로 본다면, 교구 공동체가 더욱 강조되고, 개별 교구 공동체가 스스로 구성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는 전례 예식이 더욱 강조될 것이다.
바로 교회의 개혁이 있었던 까닭에 전례의 개혁은 이러한 방향을 목표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례의 개혁과 교회의 개혁은 따라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전례의 예식과 형태를 결정하며, 역으로 전례의 예식과 형태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결정한다.
'전 례 상 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전례와 삶> 21. 전례예식의 다양성- 주어진 상황에 맞게, 아니면 규정에 따라서? (0) | 2013.06.12 |
|---|---|
| <전례와 삶> 20. 자발적으로, 아니면 규정된 규칙에 따라서? (0) | 2013.06.11 |
| <전례와 삶> 18. 전례에 통일성이 아니면 다양성이? (0) | 2013.06.07 |
| <전례와 삶> 17. 전례에 보다 큰 경외심이? (0) | 2013.06.05 |
| <전례와 삶> 16. 우리에게 전례 지식이 결여된 것은 아닐까? (0) | 2013.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