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구 공동체가 규정들을 준수해야 한다면 과연 자발적으로 예식을 거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교회 안에서 발전되어 온 전례법에 비추어, 논의의 여지를 부각시킨다.
이 점에 있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전례법과 전례 개념 사이에도 풀리지 않는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 옳은 얘기이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규준의 준수와 실제 상황에 대한 순종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전례가 다시 신앙적 회중들의 살아 움직이는 예식이 되고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의 인격의 완성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단지 규정에 따른 전례 행위의 수행과 성경구절의 봉독에서 스스로 책임 질 수 있는 형상화로의 진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때 자유로운 구성을 위해 보다 큰 재량을 기대하는 것은 교회 권위의 위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규준에 따른 행위보다 실제 상황에 맞는 행위에 우선순위를 두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전례적 법규들은 교회 권위의 실증적인 교의들로서, 규준의 준수를 요구하는 부차적인 법규들이다. 이 전례적 법규들은, 본질에 맞는 범위 안에서 예식 집행이 보다 간편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곳, 또한 그런 간편한 예식이 본질에 부합한다는 점이 보증되어야 하는 곳에서 필요하다
그러나 과도하게 경직된 단일한 예규들은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예규들은 본질에 맞는, 상황에 적합한 전례 예식을 촉진하기보다 오히려 방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리엔트 공의회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이의 400년 동안 전례에 있어 ‘예규주의’〔규정들에만, 즉 ‘예식규정들’(Rubrica)에만 맞추는〕가 두드러졌었다.
실제 상황에 맞추는 것은 규준에 따르는 것보다 전례 예식 거행자들에게 더 높은 역량을 요구한다. 실제 상황에 따르자면 매 전례 예식은 예수님의 봉헌 그리고 복음과 일치해야 하며, 또한 교회의 전통과 일치해야 되고, 동시에 공동체 상황의 요구들과도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 보다 큰 재량이 부여되는 이러한 개방은 몇 가지 전제 조건들과 결부되어 있다.
그 전제 조건은 먼저 자신들이 선호하는 전례 방식은 후순위로 밀어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한 교구 공동체의 전례는 항상 모든 교구 공동체들의 전례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음 전제 조건은 전례 책임자들이 전 교구 공동체에게 전례적 지식을 철저히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례의 본질에 대한 통찰, 전례 예식의 방법들과 개별적인 요소들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때그때의 교구 공동체에 대한 파악, 즉 교구 공동체의 능력과 이해력에 대한 파악이 필수적인 것이다.
아마도 전례법의 발전 과정에 대한 개관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전례는 공동체 삶의 완성이다. 전례를 구성하는 원래 방식은 소극적이었다.
주교는 예수님의 명령, 복음의 정신에 위배되거나 교회의 전통에 위배되어 남용되는 행위들이 나타날 때 개입했었다. 이러한 전통은 문화사적인 발전 과정과도 항상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 안에는 다양한 전례적 전통들이 있으며,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와 완전히 다른 예식을 거행하고 있다.
이때 실제적인 예식은 문서화된 규정보다 우선한다. 문헌에는 보증된 것이 기록된다. 그러므로 전례서와 규정은 점차 규범화되어 자유로운 개진을 제한하는 전통의 증언이 된다.
따라서 전례는 이제 바야흐로 ‘실질적으로’(긍정적으로) 서서히 정리되고 있다. 전례는 문서로 확정되고 그런 다음 특정한 사용 관례들이 규정된다.
따라서 중세 이후로 예식은 전례서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가 처음으로 전례서의 개정을 금지시켰다. 이제 전례는 더 이상 실제적인 예식으로 간주되지 않고 단지 책에 쓰여 있는 것일 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법을 확산시켰을 뿐이다. 즉 다시 말해서 규범서들의 간행을 통해서 전례의 실질적인(긍정적인) 규칙은 남아 있다.
아무도 ‘자기 마음대로’무언가를 가하거나 삭제하거나 변경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주교회의와 각각의 교구 공동체에는 자유로운 재량들이 있다.
이때 매 전례 예식은 주교의 의지와 일치해야 하고, 이것은 다양한 수준에서 가능하다. 규정들의 준수를 통해서, 또한 명확한 동의를 통해서 가능하며 말없는 인내를 통해서도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긴장 상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몇몇 사람들에게 정말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받는 전례의 개혁도 전례법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진 못했고, 결코 공동체 창조성이 전체 교회의 규정보다 우위를 점하는 부정적인 전례의 규정으로 되돌아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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