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의 이면에는 몇몇 교구 공동체 안에서 표출되는 불유쾌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다.
공동체가 규정된 규칙들을 준수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대체 공동체 나름의 예식을 거행할 수 있을까?
우리의 전례 안에서 과연 인간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공동체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집회로서 간주되는 것일까?
오히려 이때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감독을 받는다는 느낌이 생기는 아닐까?
우리의 전례 행위들 안에서 예수님의 해방적 본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까?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질문들은 다시금 몰이해에 봉착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례가 전체 교회 안에서 철저히 전통에 따라서 표현된다는 사실은 아마도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때그때의 대체적인 실제 전례나 전례에 대한 개혁은 모두 자연적으로 생성된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래의 것은 덜 중요하다.
우리가 거행하는 성찬례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는 계약의 완성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다른 것들에도 관계된다.
이로써 우리는 바로 까다롭고 미묘한 테마, 즉 전례학이 일반적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사리면서 삼가는 태도를 보이는 주제에 접근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교회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예식을 거행하신 것과 다르게 성찬례를 거행할 때 우리의 교회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철저히 긍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공식적인 성찬례 형태는 성찬에의 참여 행위를 통해, 우리가 추측하는 예수님의 만찬 형태를 넘어서 의미를 확장한다.
예수님의 만찬은 오늘날의 성찬례 형태에서 성찬의 상징으로 집약되어 대규모로도 무난히 거행된다.
교황이 주례하는 미사에서, 의미와 분위기상 수십 만 명의 사람들에게 정말로 확실한 평화의 만찬으로 보이는 성찬례를 생각해보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열린 소박하지만 내밀한 형태의 예식을 오늘날 하나의 거대한 축제가 될 정도로 추상화시킨 것은 과소평가될 수 없는 존경할 만한 중요한 업적이다.
멀리서도 볼 수 있는 축제 의상과 거대한 식장은 대단위로 이루어져야 하는 의사소통의 형태 때문이며, 주식인 빵을 제외하고는 다른 곁들여진 음식들(정말 배불리 먹는 만찬이기도 했던 최후의 만찬에서 함께 놓여 있던 음식들)을 포기해야만 하는 현실을 보완하는 것이고,
성혈을 영하지 않고 성체만 영하는 단형 영성체는 대성당에서의 성찬례를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한 전례사적 업적에 속한다.”(Winfried Blasig)
예나 지금이나 백 명 또는 그 이상의 신자들이 참여하는 관례적인 주일 미사와 같은 거대한 집회들에서는 아마도 자발적인 참여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불가피하게 많은 세부 사항까지 규정해야 하는 이런 대규모 전례 예식을 20명 이하의 공동체가 성찬례를 거행하는 곳에 적용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고, 이러한 타당성 조사 없이 교회의 온 백성들에게 적용시키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이다.
소규모 성찬례에서 특별한 자율적 행위들이 허용된다는 점은 분명 전례 개혁의 의미심장한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특별한 집단이나 가족 공동체의 예식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스위스 주교회의의 방침이 진술하듯이― ‘약 5명에서 25명까지의’ 집단에도 적용된다. 이것은 평일 교구 공동체에도 적용되고 혼례식이나 장례식 또는 기념일 같은 날 미사에도 적용된다.
그러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자유들을 누리지 않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러한 자유들은 특권을 가진 작은 집단에만 거의 대부분 국한되어 있는 것일까?
정말, 왜 사제들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공동체들이 이런 자유를 이용하길 주저하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는 전승된 예식의 변화가 강한 저항과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전례는 교구 공동체의 믿음의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믿음이며 예수님의 추종자로서의 공동체의 시각이다.
전례는 변화된 신앙 태도의 첨병이 아니다. 전례는 단지 그러한 변화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위에서부터’ 정렬되는 신앙 공동체는 단지 위에서부터 지시받은 전례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신앙인들이, 교회적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함께 활동하면 할수록, 전례도 더욱더 공동체의 독자적이고 책임 있는 행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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