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가톨릭 신자들과의 대화에서, 폴란드 신자들은 전례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수백 개의 언어들과 방언들로 부서져 조각나 버렸고 그때그때의 주위 환경의 압력”에 따라 좌우된다고 유감을 토로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유감은 우리 공동체에도 항상 반복해서 나타나는 경향이다. 오늘날의 다양성이라는 것은 주관적 자의(自意)를 위한 일치의 작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신앙과 교회의 전 역사를 관찰해 볼 때 다양성 안에서 나타나는 일치란 예나 지금이나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동방 교회는 물론이요, 서방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몇몇 독일 교구들은 지난 세기 말까지도 외적 일치성이라는 이유로 로마의 예식들을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단지 자신만의 고유한 교구 예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밀라노, 리옹, 톨레도 교구 그리고 여러 수도회들도 고유한 전례 형식들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까지 이를 고수하고 있다.
점점 더 일치성을 추구하게 되고 로마의 예식을 지향하기 위해서 자기 고유의 것을 포기하게 된 데에는 많은 원인이 있다. 로마는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모든 예식들의 단일화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과로 로마의 미사 전례서인 비오 5세의 『미사 전례서』가 1570년에 제정되었을 때조차도 200년 이상 된 미사 전례의 모든 형식들은 변화되지 않은 채 그래도 유지될 수 있었다.
로마는 결코 전체 교회가―미사 전례를 동일하게 거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있었다. 미사 전례는 항상 부분 교회가 거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교회는 신자들의 모든 합법적 지역 집회에 존재하며, 자기 목자들과 결합되어 있는 이 회중을 신약성경에서 교회라고 부른다.”(LG 26)는 사실이 아주 작은 부분 교회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부분 교회의 미사성제도 실제로 “교회의 미사 전례이다.”
뿐만 아니라 전체 교회의 미사 전례인 것이다(참조: 3장). 부분 교회의 미사 전례는 바로 전체 교회의 일이기도 하다. 일치란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다양성이란 자의(自意)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일치는 바로 예를 들어 성사적 행위들의 기본적 실행에 있는 것이며, 이 행위들의 예식적인 표현 형식들은 교회마다 다르게 정립될 수 있다.
이때에 로마 전례의 테두리 안에서, 명백히 구별되는 여러 언어들을 초월하여 공통된 미사 전례의 구조와 구성 같은 보다 광범위한 요소들과 형식들이 부가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일치는 일치성을 향한 노력을 통해서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의 성취 안에서 자기 자신의 신앙을 재인식 하고 자신의 신앙이 입증된 것을 발견함으로써 보증된다.
이런 방식으로 다양함의 체험은 우리의 신앙을 풍요롭게 해주고 활기차게 해준다.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교회적 삶의 힘은 바로 우리가 신앙의 여러 다양한 표현 양식들을 고유한 개념과 실제에 비추어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대신, 성찰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데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시종일관 교회의 바람은, “신앙이나 공동체 전체의 선익에 관련되지 않는 일에서, 엄격한 형식의 통일성을 적어도 전례에서는 강요하고자 하지 않는다.”(SC 37)
그렇다. 교회는 “여러 민족과 인종의 정신적 유산과 자질을 계발하고 향상”시키며 “민족들의 풍습에서 미신이나 오류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호의로 존중하고, 또 할 수 있다면 고스란히 보존하며, 더욱이 참되고 올바른 전례 정신에 부합하기만 하면 때때로 전례 자체에 받아들인다.”(SC 37)
구체적인 전례 공동체에 공동적,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는 대중 언어 사용이 전제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교회에 합법적으로 여러 가지의 예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예를 들어 SC 4). 로마의 예식 자체도 “변경할 수 있는”(SC 21) 부분들에서 “우리 시대의 요구에 더 잘 적응시키고”(SC 1),
“로마 예법의 실질적 통일성이 보존된다면, 여러 집단, 지역, 민족들을 위하여, 특히 선교 지역에서는, 정당한 다양성과 적응의 여지가 남겨“질 때(SC 38),
그리고 마침내는 심지어 엄격한 중앙 집권화를 지양하는 한도 내에서, ‘보다 깊숙이 효력을 발생하는 적응 작업’이 주교회의를 통해서 가능해질 때, 그때에야 비로소 전례 공동체의 능동적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SC 40).
도대체 누가 오늘날도 여전히 자이레나 인도의 전례가 독일의 전례와 똑같이 거행되어야 한다고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일치와 다양은 상반된 대립이 아니다. 교회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려면 교회는 공간 안에서, 또 시간 안에서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은 단일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양함을 통해서 일치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는 전례에도 해당된다.
따라서 우리의 전례서들도 이젠 더 이상 그저 단순히 로마의 전례가 아니라, 예컨대 이미 로마적․독일적 전례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이와 똑같은 논리가 다른 나라들과 지역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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