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공동체는 표징 없이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전례적 행위는 표징에 의존한다.
모든 인식은 감각들로 시작된다. 하느님과의 만남도 표징들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인식될 수 있다.
표징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원성사(原聖事)이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모든 인간들에게 제공된 구원의 표징이며 성사이다.
우리가 이 표징적인 것으로 인해 갖게 되는 난점은, “산업 시대의 인간은 ⋯⋯ 전례적 행위에 대해서 더 이상 능력이 없는 것”(Romano Guardini)은 아닌지 하는 질문, 즉 표징적 표현에 대한 무능력에 관한 질문에서 분명해진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과거의 사람들보다 표징에 더 인색하고 표현하는 데 보다 주저함을 보인다 하더라도, 여전히 “깃발을 올리고 내리고, 머리를 시위나 하듯이 길거나 짧게 하고 다니고, 생일날 꽃을 선사하고, 승리자의 메달과 우승컵을 수여하고 받고, 사열식을 거행하고, 양초를 사고 불을 붙이고 있다.”(Heinrich Renninigs)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지금까지 전례에서 사용되어 온 많은 표징들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비신자(非信者)들이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고, 오랜 전통에서 전승된 표징들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든다.
반복되는 행동 양식들을 나타내 주는, 인간 실존 일반의 특징들이라 할 수 있는 예식은 공동체 안에서 신앙의 표현에 기여한다.
그러나 예식의 형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행위는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될 때만, 단지 그럴 때만 반복되어야 한다.
전례적 행위의 본질적 특징들은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에 따르면, 강물에 몸 씻기, 손을 머리에 올려놓기, 기름 붓기, 빵을 쪼갬과 같은 상징들, 몸짓, 손짓 등에서 관찰된다.
동시에 신앙의 역사는 믿음의 표징들이 발전한 역사이다. 이때 비본질적인 표징들의 지나친 강조와 주요 표징들의 모호함(약화)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표징들이 되풀이되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야기한다. 따라서 “전례문과 예식은 그것이 뜻하는 거룩한 것들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도록 정리되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교 백성이 될 수 있는 대로 그것들을 쉽게 깨닫고, 공동체 고유의 전례 거행에 온전히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SC 21)
전례문들과 예식의 형식들은 고귀한 단일성의 광휘를 그 자체에 지니고 있어야 하며,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간파할 수 있고, 불필요한 반복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신앙인들의 “이해력에 맞추어”야 하며, 또한 “간단명료하여” “전체적으로 많은 설명이 필요 없게 하여야 한다.”(SC 34)
전례문들과 예식의 형식들은 단지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심을 육성시켜 주고 강화시켜 주며, 말씀과 사건을 통해서 믿음을 현시해주고 있다(SC 59).
교구 공동체에서는 본질적인 것을 덜 중요한 표징들로부터 선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질적인 표징들은 우선적으로 전례 예식을 거행하는 교구 공동체 자신이며, 인간의 기본 상황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식사 공동체나 목욕이나 신앙의 서약과 같은 표징들 안에서 새로운 권한을 부여받는 성사 예식들이다.
이때 표징들은, 일반적으로 그 자체로 재차 표징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을 통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모조품이 되어 빈 표징들이 그 안에서 보이는 현재성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면 해석하는 말씀은 충족되지 않는다. 즉 거의 종잇장 같은 성체는 빵의 형상을 거의 인식시키지 못한다.
사제의 쪼개진 성체는 빵 나눔(성찬에의 참여)―초기 교회 공동체가 성찬례를 이 빵 나눔에 따라 명명한―을 거의 설명해 주지 못한다.
말로 이루어지는 평화의 인사는 몸짓 없이 텅 빈 채로 남아 있으며, 세례 받는 사람에게 성수를 붓는 것은 물속에 몸을 담그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죽음과 부활을 표현해 주지 못한다. 이것은 전례 예식에서의 시간, 공간, 태도들에도 해당된다.
『세계의 상』(Weltbild)이라는 잡지의 여론 조사에서 6,500명의 가톨릭 신자들 중의 80%가 표징들의 단일화를 환영했다.
그러나 동시에 거의 반수가, 미사의 개혁이 표징 행위들 안에서 표현되는 예식성을 채택했다는 사실에 유감을 표명했다.
우리의 전례 안에서의 감정적인 면이 상당히 줄어든 원인은 개혁에서 추구한 것이 아닌, 차별화되지 않고 인간을 적대시하는 탈신성화(脫神聖化)의 욕구에 있다.
표징 안에서만 믿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이러한 표징들은 받아들여져야 하며, 경우에 따라 설명도 필요하다.
표징은 믿음을 대치한 넋이 아니며, 믿음 없이는 효력이 없다. 그러나 생동하는, 쉽게 이해되는 거동이 말보다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체험된 사실이다.
교구 공동체는 단지 말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완전히 본질적으로 주님 자신에 의해서 설정된 표징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서도 강해진다.
이 행위의 가시성과 이해 가능성은 우리가 모든 전례 예식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인식하고 유지하는 데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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