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찾는 이들의 마음은 기뻐하여라.”(시편 105,3)
이 시편의 문구로 연중 제30주일의 성찬례가 시작되고 있듯이, 모든 전례는 그렇게 거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쁨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당연했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의 모임의 본질적인 기본 특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고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사도 2,46 이하)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쁨을 얻기 때문에, 주일에 기쁜 마음으로 모인다.
전례 예식에서는 과거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셨음이 기념되고, 현재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이 체험되며, 앞으로 다가올 구원의 완성이 미리 내재적으로 구원되어 간다.
따라서 기쁨에 가득 찬 이유가 분명해지게 되고, 우리의 예식 거행은 바로 그에 대한 표현이다.
이때 거행되는 예식은 현실을 배제하는 예식이 아니며, 불행과 고통을 망각시키는 아편과 같은 역할을 하거나, 지나친 환호와 소요를 불러일으키는 방만한 상태에서 거행되지 않는다.
올바른 예식 거행인지 아닌지는, 그 예식을 거행하는 중에 고통을 떠올릴 수 있는지, 또 고통 받는 사람들도 초대되었는지, 아니 바로 그 고통 받는 사람들이 초대되었는지의 여부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예식에서는 역사 안에서 고통을 겪고 죽은 사람이 살아 활동한다. 그리스도교의 예식은, 하느님께서 이러한 극도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삶의 빛으로 비추시며 받아들이시는 것을 찬양하면서 선포한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기쁨은 이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모든 눈물들이 마르게 되는 것에 대한 기쁨인 것이다.
전례는, “지금의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듯, 하느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심으로써 당신이 만드신 인간을 구원의 기쁨으로 채우신다는 확실한 희망 안에서, 일단 하느님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인 것이다.”(Dieter Emeis)
따라서 장례 예식조차도 단지 죽은 이에 대한 애도일 뿐만이 아니라 부활을 의식하는 가운데 거행된다. 낙관주의와 기쁨이라는 궁극적인 기본 의식 안에서 거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추상적인 이론으로 남아 있어선 안 된다. 우리는 이 기쁨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예식을 통해 체험하여야 한다. 이 예식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어 우리가 기쁜 존재가 되도록 하는 예식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전례를 통해 기쁨을 창출하기는 어려워도, 기쁨이 주어지는 것을 방해하기는 쉽다.
자율적인 형식의 전례를 허용하지 않는 고정된 예식, 비록 ‘합당하게’ 예식을 거행할지라도 교회 공동체와 소통하지 못하는 예식의 주재자, 공동체의 예식을 거부하는 개인적인 신앙심 등등 그 방해 요소는 여기에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과 표징을 통해 하느님과 회중이 이어지는 수평적 관계, 서로 함께하는 기쁜 상태, 서로 함께 이야기 나눔, 서로에게 보이는 관심과 같은 것들이 기쁨이었다.
우리 전례 예식의 현실은 유감스럽게도 성찬례의 문구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신께서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면전에서 넘치는 기쁨을,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을 누리리이다.”(시편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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