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신체적인 표현형식을 동원하여 전례를 축제로 만들 수 있을까?
전례 예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계되고, 즉 그들의 모든 감각과 의식들에 관계되고,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에도 관계되는 축제이어야 한다.
“공동으로 기도하는 곳에 그 기도하는 사람들의 몸도 자리해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들이 어떠한 동작을 취함으로써 인간 특성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Josef Sudbrack)
오늘날 자이레에서 거행되는 미사에서는 입당이 입당 성가의 리듬에 맞춰 춤추면서 행하여지고, 제단 봉사자들은 대영광송을 할 때 춤을 추며, 모든 전례문들은 몸짓들로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일반적으로 춤을 통해 기쁨을 표현하며 전례 예식을 끝맺는다. 
이러한 형식은 과연 아프리카에만 적합한 것일까?
이런 것이 우리한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고대 그리스도인들의 전례 예식이 오늘날의 우리의 전례 예식보다 더 활발하고 더 생동적이고 더 의사소통이 수월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초세기에 교부들이 빈번히 교회 내에서의 춤을 반대하고 나섰다는 사실은 단지 춤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녔던가 하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그때 교부들은 춤 그 자체를 반대하였던 것이 아니라, 춤의 변질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육체적인 표현이 육감적인 유희로 변질되면서 언제나 남용과 오용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춤 그 자체가 아닌 춤을 변질을 반대했다는 것은, 이미 춤이 전례에서 순수한 영성 고양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 아닐까? 춤은 교회에서 여전히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1298년 뷔르츠부르크(Würzburg) 공의회가 교회 내에서의 춤을 굳이 중죄로 선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가 시작될 때까지도 여전히 프랑스 주교좌 성당에서는 성직자들이 춤을 추었는데 주로 윤무(輪舞여럿이 둥글게 돌아가며 추는 춤)였다.
춤은 리듬에 따라 순서가 정해진 정형화된 동작으로 바뀔 수도 있었고, 오늘날 예식 행렬도 여전히 거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전례 예식들을 통해 가톨릭 신자로서 충만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같이, 특정한 전례 예식들은 그 기쁨을 종종 자발적인 춤으로 끝맺기도 한다.
개혁된 전례는 의식적으로 각국의 고유한 춤의 형태를 포함시키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것은 아직도 어린이와 청소년 전례(미사를 포함하여)에만 국한되어 있고, 물론 이러한 전례는 공식적으로 「어린이 미사 지침」이 제시해 주고 있는 방식으로 거행하도록 권고된다.
춤이 포함되는 전례는 독서에 대한 화답으로서 또한 헌금 준비 중에 자주 있게 되며, 이때는 유희와 춤이 종종 서로 섞이게 된다.
유희와 춤은 전례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예증을 제시하고, 전례를 보다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것들은 복음의 선포를 미리 마련해 줄 수 있으며 명료하게 해줄 수 있고, 일상생활에까지 연장시킬 수도 있다.
유희의 측면은 적어도 어린이 전례를 위해서 오래전부터 인정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문헌은 벌써 엄청나게 발행되었다.
우리의 전례에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동작이 있다. 서기, 구부리기, 무릎 꿇기, 앉기, 혹은 때대로 공동으로 박수 치기―이런 것들은 결속감의 표현이며, 공동의 행위와 공동의 신체 경험의 표현이다.
그러한 동작은 확실히 아직 춤은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은 그리스도인들의 전례 예식에서 춤의 형태를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토대, 즉 “민족들의 풍습에서 미신이나 오류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면” 전례의 공간 안에서 허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SC 37).
이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쇼(Show)가 아닌 감정을 표현하는 제시적 춤이 있는데, 이때는 공동체가 내면적으로 함께 춤을 춘다.
이 제시적 춤으로 거행될 수 있는 전례 예식은 참회 예식과 복음의 선포이다. 또한 기도 몸짓으로서의 춤이 있다. 이는 이를테면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공동체의 화답으로서의 춤이나, 주님의 기도 같은 기도문과 찬송에 동반되는 춤을 말한다.
아마 우리나라의 전례 전통에는 없을 법한 공동체의 춤도 가능하다. 공동체의 춤은, 무엇보다도 청소년 전례 예식에서 볼 수 있듯이, 대개 자발적으로 행해진다.
평화의 인사와 영성체 예식 이후 또한 마침 예식 이후의 시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제시적 춤이 끝나면서 행렬의 행진이 시작된다.
따라서 행렬의 행진은 말씀의 전례에서 성찬의 전례로 인도해 주는 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소집단에 가장 적합해 보이는 묵상적 춤도 있다.
분명, 지금 일반적인 주일의 전례 예식에서 춤의 형식들과 유희의 형식들을 열렬히 수용하자는 의견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공동체는, 어떻게 하면 신체적인 표현 형식을 동원하여 전례를 축제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은 전례를 담당하는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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