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례 상 식

<전례와 삶> 23. 여론조사에 의하면, 교회 다니는 30세 이상의 사람들이 별로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dariaofs 2013. 6. 15. 11:20

 

 

여론 조사에 의하면, 교회 다니는 30세 이상의 사람들이 별로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이 맞는다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삶을 중단되지 않는 축제로 만들어 주신다.”(Athanasius, †373)고 알았던 고대 교회와 얼마나 상반되는 것인가! 우리는 오늘날 단지 기뻐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예식을 거행할 능력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실행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긴장되고 소모적인 경향을 지니며, 그 행위가 유용한 것인지 증명할 수 있어야 인정된다.

 

그러나 축제적인 것과 예식은 사랑처럼 무용한 것이며, 단지 이미 계획되어 있는 순서들의 진행을 방해하고 세상의 필수적인 움직임에서 다른 쪽으로 빗나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예수의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결정적인 것을 행하셨기 때문에 처음부터 더 이상의 성과(성취)를 가져올 필요가 없다는 신념으로 함께 모인다.

 

예수의 공동체는 특별한 성취들로부터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구원, 치유, 평화를 고대한다. 그들은 감사하고 찬미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희망을 노래하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며, 동시에 불충직함과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도 서로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화답송에서도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음 바른 이들아, 모두 환호하여라.”(시편 32,11) 하며 노래하고 있다.

 

이에 반해서 항상 반복된 오랜 질문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선하다고 받아들이시도록 하려면 대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내리신 명령의 실행이라면, 그 어떤 실행도 하느님께서 주신 다음과 같은 권리의 주장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갈라 2,16) 오직 사랑에 대한 믿음만이 필요하다. “율법을 통하여 의로움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갈라 2,21)

 

예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동료에게로 향하는 것을 의미하며, 과거의 세대와의 결합을 가능하게 해주고, 하나의 공통된 미래에 대한 희망의 지평을 열어준다.

 

더 나아가 전례 예식에서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역사 안에서 당신의 역사를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다.

 

그 때문에 전례적인 집회는 항상 축제적인 집회로, 그리고 전례적인 행위는 예식 거행으로 이해되어 왔다. 외적인 소비나 인위적인 형식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축제적인 기쁨과 감동은, 온갖 화려함을 과시하며 순서가 전개되는 장엄 대미사보다, 궁핍한 시기의 가련한 상황에서 성찬례 때 하나의 초를 밝히고 행하는 소규모 집단에 더욱 크게 자리할 있다.”(Heinrich Rennings)

 

교구 공동체는 하느님의 행위와 하느님께서 주신 것들을 기리고, 또한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기린다. 유용성과 목적의 척도는 여기서 아무런 타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전례는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몇 안 되는 오아시스들 중의 하나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 공동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전례적 행위가 “늘 자꾸 망각되는 가치들에 주목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Huub Oosterhis).

 

타인을 위한 현존은 전례에서 특히 명백해진다. “올바른 예식 거행인지 아닌지는 그 예식 가운데 고통도 생각될 수 있는지,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도 초대되었는지, 아니 바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예식에 초대되었는지 그 여부에 달려 있다.

 

고통을 도외시하고 슬픔에 처한 사람들을 배제한 축제는 현실성을 배제한 축제로 남는다.”(Dieter Emeis) ‘미제레올‘(Misereor: 매년 사순절 예물로 개발도상국의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독일 가톨릭인들의 조직)이나 ’아드베니아트‘ 〔Adveniat: 1961년부터 독일에 도입된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들을 후원하기 위한 가톨릭인들의 성탄절 기부금의 명칭.

 

기쁨과 축제 안에 군집한 교회 공동체에서 성장한 “Brot für die Welt”(세상 사람들을 위한 빵)과 같은 활동들〕만큼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자발적으로 모인 곳도 없다.

 

이러한 예식은, “모든 것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곳, 그곳에서 생겨나는 야만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그리스도의 축제를 거행하기 위한 특별한 ‘축일’은 필요치 않다. 주님의 돌아가심과 부활은 연중 시기에서도 주일의 기쁨의 동기이다.

 

이때는 그 어떤 예식 순서도 급히 서둘러 진행되어서는 안 되며, ‘예식의 당위성’이 완성되어야 한다.

 

예식의 거행은 조급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여론의 인기를 얻기 위한 분위기를 만들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거행되는 지루함을 자아내지도 않으며, 또한 그 어떤 종류의 강요적이 수고를 포함하지 않는다.

 

예식의 거행은 죄인의 행위에서 표현되는 것과 같은 그 어떤 경쾌함을 필요로 한다(참조: 루카 7,36-50).

 

그렇다고 그러한 축제 예식이 그 자체로 모든 불공정함과 눈물들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예식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최상의 포도주가 처음으로 식탁 위에 나오는 즐거운 결혼식 축제가 진행되는 세계의 시작이다.”(Harvey C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