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정의철 신부
집회 자체가 특정한 목적과 기능을 지니고 있듯이 각각의 개별적인 요소들, 즉 매 기도문과 각각의 행위들도 나름대로 사명을 지니는 것이다. 미사 시작을 위한 성가는 화답송과는 약간 다르며 이 화답송은 또 파견 성가와는 약간 다르다.
춤출 때, 긴장을 완화할 때, 또한 합창할 때, 적합한 음악과 적합지 못한 음악이 있듯이 전례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
이때는 한 가지 동일한 목적이 다양한 형태로 실현될 수 있다.
입당 성가가 미사 참여자들의 소리를 하나로 일치시키고 한군데로 모아야 한다면,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의 음악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즉 전례문의 유무(有無), 악기 연주 여부, 공동체와 함께할 것인지 아닌지, 지휘자나 합창단의 유무, 동음 함창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다음(多音) 합창으로 할 것인지 하는 실행 방법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열거는 전례 개혁이 어떤 기준을 완화하며 미사 전례를 자유롭게 해 주었는가를 명백히 해 준다.
이제 음악이 지닌 환상(Phantasie)과 창작성이 전례적 기능과 결합되면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공동체가 교회 성가의 형태만을 알고 있다면 그 공동체는 음악적으로 빈곤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일마다 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시도하는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평화 안에서’(Im Frieden dein)를 만 번 연주했다는 이유로 공동체의 전례 예식이, 그 전례 예식의 오르간 연주자가 ‘금빛 오르간’을 얻을 만한 자격이 있는 훌륭한 전례 예식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공동체의 전례가, 매 토요일마다 완전히 새롭게 생산되고 월요일에는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그러한 낭비적 전례로 거행되어서는 안 된다.”(Heinrich Rennings)
기능에 합당한 형식을 유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각각의 요소들이 다른 요소들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것도 문제시 되어야 한다. 개별적인 요소들의 횡단면과 전체 예식의 종단면이 일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동일한 형태의 너무나도 빈번한 반복은 피해야 한다. 
말하자면 선율 형식이나 반복 형식만을 지니는, 짧은 간격으로 이루어지는 3절이나 4절의 성가들은 피해야 한다.
동일한 형식은 개별적인 부분들의 그때그때의 기능을 별 차이 없게 만들기 쉽다. 여기에서 전승된 음악과 새로운 음악의 결합을 위한 시도가 요구된다.
성가들이 수(數)도 유념해야 한다.
즉 그저 많은 종류를 건드리지 않고 차라리 몇 안 되는 성가들로 진행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집회 참여자들과 표현 형식들의 일치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원래 동일한 음악이 젊은 사람들과 나이 든 사람들 모두의 표현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이것으로 수준 여하를 따져서는 안 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찾아서, 그가 보다 좋은 상태로 유지될 수 있는 곳으로 가도록 그의 준비를 일깨워 주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그가 있는 곳에서 그를 데려오게 되는 전례 예식, 바로 그런 전례 예식으로의 초대로 이해하여야 한다.”(Heinrich Ren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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