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인 회당의 파괴와 유다인들에 대한 대량 학살은 수백 년 동안 유다인들을 하느님의 살해자로 보았던 그리스도교와 별개의 것으로 볼 수 없다.
신학자들은 유다인들을 그리스도인들의 공개적인 적으로 칭하면서 유다인들의 교회는 불살라져야 하고 그들의 신앙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하느님의 평화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귀를 기울여 주셨던 선택된 민족과의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
주일 독서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한 분이 아니시냐?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서로 배신하며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더럽히는가?”(말라 2,10)
일단 주일 전례에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상호 간에 이해를 가져올 수 있는 충분한 동기가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례에서 모든 유다적인 요소들을 멀리한다면, 남을 것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전례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면에서 유다교의 기도 행위가 옳음을 인정하는 많은 세부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우리에게 공동체로서의 특성이 중심이 되는 것처럼, 유다인들의 사상의 중심은 기도 행위이다. 우리는 성경의 공통성들, 무엇보다도 시편의 공통성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주님의 기도’도 ‘18 축복 기도문’과 비교될 수 있으며, “거룩하시도다.”(Sanctus)는 ‘Queduscha’에 상응하고, 성찬례는 ’Sederabend’와 대조될 수 있고,
파스카 축제 없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식을 거의 상상할 수 없다. 본질적인 차이는 그리스도에 한 신앙고백에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은 “확장된 유다인들의 부활 축제인 것이다.”
유다인들이 파스카 축제 중에 이집트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예식을 행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뿐 아니라 동시에 이스라엘의 해방도 축하하는 예식을 거행한다.
특별히 유다교 전례와의 명백한 일치는 예물 준비 기도에서 찾을 수 있다(“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 ”). 이것은 언어적으로 거의 유다교의 ‘Beraka’(찬미)에 상응한다(참조: 31장).
성찬례의 감사 기도도 Beraka처럼 감사와 찬미이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시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는, 또한 생명을 선사해주시는 하느님의 행위들에 대한 체험이며, 이에 인간이 하느님께 응답하는 찬미이다.
아버지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것, 그리고 구원을 약속하는 유다인들과의 연대 책임을 증명하는 것, 이것은 새로 개혁된 전례에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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