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3월 4일 가해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성 가시미로)

dariaofs 2014. 3. 4. 07:46

 

 

 

폴란드의 국왕 가시미로 4세와 독일의 황제 알베르트 2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난 13명의 자녀 가운데 3번째인 성 카시미루스(Casimirus, 또는 가시미로)는 크라쿠프(Krakow)의 궁성에서 태어나 요한 들루고즈(Joannes Dlugosz) 신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스럽고 엄격한 생활 그리고 사랑이 충만한 생활을 원하였다. 그는 정당하지 못하다는 어떤 확신에 따라 그의 부친과 헝가리 귀족들이 요구하는 헝가리의 국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의 축출 공작에 군대를 인솔하는 직책을 거부하였다.

 

그는 이 결심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또한 그는 부친이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노력을 일축하고 학문과 기도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그의 부친이 폴란드를 떠났던 1479-1483년까지 부왕 노릇을 하였으며, 리투아니아(Lithuania)를 방문하는 길에 그로드노(Grodno) 궁성에서 운명하였다.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의 주교좌 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는 수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1522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Hadrianus V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성인이다.
 

 

강론   :   (마르 10,28-31)

 

<내세, 현세>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이 말은 예수님께서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 사도가 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는데,

그러면 저희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있습니까?"

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9장 27절을 보면,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더 있는데, 거의 비슷한 뜻으로 생각됩니다.

이 말을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으니

저희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십시오." 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이 말씀은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을

'받겠지만'이라는 말 뒤에 놓고 읽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현세의 부귀영화를 약속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무한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하느님 나라에서 물질적인 보상을 백 배로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무한하고 영원한 행복'을 뜻하는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이라는 말은

누구나 무조건 현세에서 박해를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고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 라는 뜻입니다.

 

(루카복음 18장 30절을 보면,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말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입니다.

뭔가를 버리는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버리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는 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닙니다.

특히 가족과 가정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실제로 가족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족과 가정에서 얻는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행복을 초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집과 토지 같은 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당하게 노동해서 얻은 재산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물질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쁩니다.

따라서 집과 토지 같은 재산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도

그런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버림'과 '비움'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더 큰 행복을 받기 위해서

세속의 작은 행복들을 초월하는 '버림'과 '비움'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무소유'만 강조하는 것도 집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내세의 삶'만 중요하고 '현세의 삶'은 쓸모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에 그런 뜻이라면

빨리 죽어서(자살이라도 해서) 내세로 들어가라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박해를 받더라도 그것을 참고 견디면서

현세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은 그래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하느님 나라'를 바로 이곳에 건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죽어서 영혼이 된 사람들만 있는 저승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건설되는 나라입니다(루카 17,21).

 

두 번째 이유는 '현세의 삶'과 '내세의 삶'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별개의 '삶'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현세의 삶'을 열심히 살아야 '내세의 삶(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죽어서 내세에 가야만 '참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세의 신앙생활에서도 그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 '마리아의 노래'에서 말한 '기쁨'은

나중에 내세에서 얻게 될 기쁨과 행복이 아니라 '지금'의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복 선언'도(마태 5,3-12)

"나중에 내세에서 행복하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행복하다."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 서간문에서 강조한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이 죽을 때까지 참고 견디면서 복음을 전한 것도

그 일이 '지금' 기쁘고 행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나 신앙인들은 언제나 체험할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신앙생활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희생할 수 있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내세의 무한한 행복은 현세의 신앙생활에서부터 시작되는 행복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