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3월 7일 가해 (성녀 페르페투아와 펠리치타 순교자 기념일)

dariaofs 2014. 3. 7. 01:00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Felicitas) 및 4명의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초기 순교자들의 전기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이다.

 

일부는 성녀 페르페투아 자신이 그리고 다른 일부는 나머지 순교자들이 기록한 글에 의해서 하나의 전기가 완성되었다.

 

성녀 비비아 페르페투아(Vibia Perpetua)는 좋은 가문의 딸로서 순교 당시에 귀여운 아기를 팔에 안은 젊은 부인이었고, 성녀 펠리치타는 여종이었다.

 

나머지 4명의 순교자는 노예였던 성 레보카투스(Revocatus), 성 세쿤둘루스(Secundulus), 성 사투르니누스(Saturninus) 그리고 성 사티루스(Satyrus)이다. 로마 제국 내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황제의 칙령에 따라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Carthago)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검거할 당시 성 사티루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예비자였으나 모여 있던 집이 포위될 순간에 모두 세례를 받고 함께 감옥에 갇혔다.

그 당시에 성녀 페르페투아는 처음으로 하늘을 오르는 사다리를 꿈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신비한 어느 사제의 방문을 받았는데 그는 이교도의 사제였다.

 

성녀는 “나는 그 노인의 불행을 슬퍼하였지요.” 하며 아기를 안고 걱정하던 차에 체포되었다. 재판정에서 그들은 모두 맹수의 밥이 된다는 판결을 받았다.

 

감옥에 돌아온 뒤에 성녀 페르페투아는 두 번째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어릴 적에 죽은 동생을 보았다. 그리고 성 사티루스는 자신이 천국에 당도한 꿈을 꾸었다. 이윽고 순교의 날이 왔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너희들이 우리를 심판하였으나 하느님은 너희를 심판할 것이다!” 성녀 페르페투아의 일행은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하느님의 귀여운 자녀답게” 형장으로 나갔다. 맹수들이 덤벼들자 그들은 서로를 붙잡고 의지하다가 한 사람씩 죽어갔다.

 

 

강론   :   (마태 9,14-15)

 

<단식>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 기간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실 때 예수님과 함께 지낸 제자들에게는

그 시간이 '기쁨의 시간'입니다.

'단식'이 슬픔을 뜻한다면 그 시간은 단식을 할 필요가 없는 시간입니다.

(좀 더 강하게 표현하면 '단식을 하면 안 되는 시간'입니다.

기뻐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죽음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성금요일부터 부활절 아침 전까지 그 이틀 동안

제자들이 단식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루카 24,41)

그들이 바로 먹을 것을(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예수님께 드렸다는 것을 생각하면(루카 24,42)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충격이 너무 커서 단식을 생각할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너무 슬프고 놀라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겠지만...)

 

제자들이 정기적으로 단식을 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승천 뒤부터입니다.

그 단식은,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단식도

'슬픔'을 뜻하는 일이 아니라

'극기, 절제'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또 회개와 보속을 한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넓은 뜻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혼인 잔치'는 나중에 우리가 들어가게 될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단식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슬픔이 없고(묵시 21,4),

또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회개, 보속, 극기, 절제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오직 기쁨만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한 단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 '신랑을 빼앗길 날'을 '신랑을 잃는 날'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 있는 날,

또는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는데(마태 28,20),

우리 쪽에서 예수님을 떠나 있을 때가 많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떠난 '잃은 양'이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양을 잃는 것은 목자 탓이 아니라 양의 탓입니다.

목자가 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양이 목자를 떠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때,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단식에 회개와 보속의 뜻이 있음을 생각한다면,

성인 성녀들 외에는 모두 날마다 단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도 날마다 단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정해진 날만이라도 성실하게 단식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이라도(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이라도)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고 있다면

단식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있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루카복음에 나오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작은아들이 회개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배고픔'이었습니다(루카 15,16-17).

그런데 그 아들이 그렇게 굶주리고 있을 때

아버지는 마음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분명히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날부터 돌아온 날까지

거의 밥을 먹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잔치를 벌인 것은(음식을 먹은 것은)

그 전까지 아버지가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일과 연결되고,

또 아들이 굶주리고 있었다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그 잔치는 그동안 굶주렸던 아들을 위한 잔치이면서 동시에

아들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했던 아버지를 위한 잔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작은 아들 때문에

그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작은아들이 나중에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는 과연 마음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너무 죄송스러워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단식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성모님도)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면서 애를 태우고 계실 것이고,

그래서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죄인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무도 마음 편하게 먹지 못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