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6,1-6.16-18)
<흙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다시 또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순 시기는 극기고행과 회개와 보속을 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사순 시기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에는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을 합니다.
'재'는 죽음을 상징하고,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은 회개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재의 예식' 때에는 인간이란 흙에서 나왔고,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말씀을(창세 3,19) 듣게 됩니다.
이 말씀은 결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인간이란 원래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회개가 시작됩니다.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것만 회개가 아니라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
또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사람들은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창세 11,4)."
라고 말하면서 탑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잊어버리고
조물주이신 하느님께 도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탑을 쌓는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의도와 목적이 악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탑을 쌓지 못하게 막으신 것은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고, 보호 조치이기도 합니다.
인간들이 멸망하기 전에 그것을 막아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맞아서 그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이
혹시 바벨탑을 쌓는 일은 아니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뭔가를 이루려고 애를 썼던 일들이 혹시 하느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신앙인이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라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의 멸망을 예고했을 때(요나 3,4),
니네베 임금을 비롯해서 모든 백성이 회개와 단식을 했습니다(요나 3,5-6).
그때 니네베 임금이 했던 말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9)."
이 말은 '하느님은 우리를 멸망시키실 수도 있고,
구원하실 수도 있는 주님'이라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있었거나 안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세력이 강하다는 것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자기들의 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인정했고, 그래서 자기들을 낮추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니네베의 멸망을 예고하라고 시키신 일은
정말로 그 도시를 멸망시키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재의 수요일에 인간이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흙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모든 인간들을 흙으로(또는 먼지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허무하게 먼지가 되어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에는 한 줌의 먼지로 사라질 뿐이라면,
예수님의 구원 사업도, 우리의 신앙도, 회개도 모두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흙에서 나온 존재이지만 다시 흙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마태 22,30).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바꾸지 못한다면
하고 싶은 일을 참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신앙인은)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3)."
현세에서의 모습만 보면,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삶과 죽음이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선을 '죽음 너머의 삶'으로 돌리면
양쪽의 삶과 죽음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의 삶과 죽음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죽으신 예수님은 흙이 되시지 않았고, 부활하셔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수 있음을 믿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 자체가 곧 사순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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