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3일 (사순 제3주일) 요한 4,5-42
옷 만들기 동아리 모임을 마치고 시내에 나갔습니다. 시내라고 부르기는 좀 작지만 그래도 낮에는 사람들이 많이 보입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사람들의 옷차림에 변화가 있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두툼한 옷을 입은 사람은 저 밖에 없네요. 식당에 들어가면서 옷을 살짝 벗었습니다. 산 중턱에 성당이 있어서 그런지 밤에는 조금 서늘합니다. 그래도 이제 옷차림에 변화를 주어야겠습니다.
상담을 공부하면서 ‘자유’라는 단어를 삶 속에서 살아있는 언어로 체험하였습니다. 병원사목을 담당하다가 첫 본당 발령을 받은 곳이 공교롭게도 성전 건축을 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성전을 짓는다는 보람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풀리지 않는 감정의 닫힘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면 이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당황스러웠습니다. 제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성전 건축의 어려움을 핑계로 술도 마셨습니다. 아마도 대청댐 물이 찰랑찰랑하게 채워질 정도로 마셨나봅니다.
매일 아파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마주 대하다가 기운이 빠져버렸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정신적 힘이 사라지면서 무기력에 빠져들었을 때, 주교님께 청했습니다.
병원사목에서 다른 사목으로 옮기고 싶다고. 그 결과가 본당사목이었습니다. 어떤 기대를 지니고 있었나 봅니다. 본당에서의 즐거움과 만남에 대한 기대. 그런데 기대는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나눔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중재와 정리가 제가 해야 하는 일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분노가 가슴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녁 늦은 시간, 마을을 걸으면서 감정을 가라앉히고, 다음 날이면 웃으면서 사람들을 만났지만 풀리지 않는 분노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지난 시간들의 상태를 보여주는 사진을 꺼내서 보기도 했습니다. 사진 속의 저는 맑고 밝았습니다. 자신감이 있는 청년의 모습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굳어버린 얼굴과 부자유스러운 몸짓을 지니고 사는 중년의 남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년의 남자는 아버지를 닮아있었습니다. 화해하지 못한 아버지, 화해의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먼저 하느님 나라로 여행을 떠나신 아버지, 그렇게 닮기 싫었던 모습을 판박이처럼 닮아 있는 중년의 남자.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내가 싫어하던 모습으로 변한 이유가 무엇일까?”
상담 공부를 하면서 제가 살아온 삶의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한 어린 시절의 저는 늘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투쟁하고 울었습니다. 울음은 나약한 것이라는 강제된 사고가 저를 분열시켰습니다.
그래서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아파도 괜찮은 척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는 제 감정을 온전하게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알지 못하고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웃과의 만남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 되었고, 정신은 건조해졌습니다. 무엇인가 탈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상담 공부입니다. 무엇보다 저를 알고 싶었습니다.
늘 외로웠던 나, 그리고 생존을 위하여 외로움의 장소를 일부러 찾았던 나, 외로움을 생존을 위한 기제로 만들었던 주변 환경을 직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피하지 않고 직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화해와 애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개인 상담, 집단 상담을 통해서 제 안에서 엉켜있었던 감정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기 시작하였습니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된 싸움, 이제 내면의 어둠을 직면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어둠을 직면하면 해방과 자유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상처를 직면해야 해방을 체험합니다. 보지 않고 피하면 해방의 체험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치유는 직면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직면은 비난이 아니라 건전한 자기비판이고 애도의 과정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직면을 통한 치유는 화해를 이끌어 냅니다. 자기와의 화해, 상처를 준 그와의 화해, 그리고 하느님과의 화해.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정오에 물을 긷기 위해 나온 여인, 무엇인가 감춰야 하고 사람들과의 정상적인 만남이 어려운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겪고 있는 현실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간결하게 말씀하십니다. 에둘러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그 여인이 살아온 삶의 선택이 만들어낸 지금, 여기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변화는 놀랍습니다. 놀랍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해방을 체험하는 순간, 사람은 현재를 살아가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이웃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결국 자신이 달라집니다.
오늘을 사는 교회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저는 ‘직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말을 전하는 친교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말이 아니라, 해야 하는 말을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 그리고 “아니요” 사이에 존재합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할 때,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직면은 두렵습니다. 그리고 아프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보지 않는 상태에서 변화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두렵고 힘들지만 피하지 말고 바라봅시다.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대전교구 청양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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