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5월 3일 가해 부활 제2주간 토요일(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dariaofs 2014. 5. 3. 01:00

 

 

 

성 필립보

갈릴래아의 베싸이다(Bethsaida) 출신인 사도 성 필리푸스(Philippus, 또는 필립보)는 아마도 세례자 요한(Joannes Baptistae)의 제자인 듯하며, 사도들 명단에도 기록되어 있다(마태 10,3; 마르 3,18; 루가 6,14; 사도 1,13). 그 외에 그가 언급된 곳은 요한 복음서이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제자로 간택되었으며 나타나엘(Nathanael)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였다(요한 1,43-48).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중에도 그가 참석했고(요한 6,1-15), 예수를 찾아온 이방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하였다(요한 12,21-22).

 

예수님의 수난 직전에 그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고 간청도 하였다(요한 14,8).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를 무대로 설교하였다고 하며,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지아(Phrygia)의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십자형을 받아 순교했다고 한다.

 

성 야고보

알패오(Alphaeus)의 아들인 성 야고보(Jacobus)는 복음서에 그리스도의 12사도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같은 인물로 가끔씩 등장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 후에 예루살렘의 어느 2층 방에 모여 있던 열 한 제자 중 한 명이다(사도 1,13).

 

성 야고보는 분명히 주님의 형제로 언급되고(마태 13,55), '주님의 동생'으로 불린다(갈라 1,19). 사도 베드로(Petrus)가 자신이 기적적으로 감옥을 빠져나온 사실을 알려주라고 이른 사람이 바로 성 야고보이다(사도 12,17).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성 야고보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첫 번째 주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러므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사도 15,13-21 참조) 하고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에게 네 가지 관행만을 실천하도록 요구하였다.

후대에 생긴 전승에 의하면 성 야고보는 팔레스티나(Palestina)와 이집트에 정착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집트의 오스트라키네(Ostrakine) 또는 시리아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는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군중을 노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신전 지붕에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리고 군중들로부터 곤봉과 방망이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교회미술에서 그의 모습은 곤봉이나 방망이를 든 모습으로 자주 그려진다.

 

강론   :   (요한 14,6-14)

 

<하느님을 뵙고 싶다면>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

이 말은 필립보 사도가 한 말인데,

하느님의 모습을 직접 뵙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라는 말은

"그렇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직접 만나거나 뵙는 일은 모든 신앙인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만나거나 뵙게 된다면

더 잘 믿고, 더 잘 희망하고, 사랑을 더 잘 실천하게 될 것 같은데,

그런데도 하느님은 늘 숨어 계시는 분으로,

또는 당신의 모습을 일부러 감추시는 분으로,

또는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으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필립보 사도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고 대답하십니다(요한 14,9).

이 말씀은 "나를 통해서 아버지를 뵐 수 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사람은 아버지를 직접 뵐 수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주 뵙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은' 뵙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뵙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당신이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있게 해 주실 때,

그때가 되면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묵시록에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은 하느님을 섬기면서

그분의 얼굴을 뵐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묵시 22,4).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지금은' 우리가 하느님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지만,

'나중에는'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신앙 여정 전체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은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잘 모르고

어렴풋이 느끼기만 하면서 걸어가고 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면 모든 것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같은 질문도

그때가 되면 선명하게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은 모든 것이 다 막연하고 희미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믿는다면' 지금이라도 생생하게 하느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도들과 달리

오늘날의 우리들은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직접 본 적 없는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막연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가운데 첫 번째 일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사랑'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수 있고,

다시 그 믿음 속에서 하느님 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아라." 라는 말씀은 구경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그 사랑을 다시 하느님과 이웃에게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나는 악마를 보았다." 라는 영화 제목이 생각납니다.

만일에 우리 안에 사랑은 없고, 증오심과 복수심만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 대신에 악마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선 자기 안에 있는 악마를 보게 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이웃이 모두 악마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악마만 보이는 그곳은 지옥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사랑으로만 가득 차 있고,

그 사랑을 온전히 실천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고,

이웃 안에 계시는 하느님도 뵙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만 보이는 그곳은 천국입니다.

아마도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사랑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언제나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하느님을 직접 뵙기를 원하든지, 체험하기를 원하든지,

느끼기를 원하든지, 깨닫기를 원하든지 간에

어떻든 지금 당장 할 일은 '사랑'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