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지금여기 강론대- [신종호 신부] 사람이 보이기 시작할 때

dariaofs 2014. 5. 11. 01:30

5월 11일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요한 10,1-10

 

 

조용하고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들어 보신 적이 얼마나 되셨습니까? 우리의 존재가 평화로울 때 우리는 그런 소리를 전달해 줄 수 있고 또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지요.

 

지금은 듣기가 곤란하지만 제가 초중고를 다닐 때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저를 깨우셨습니다.

 

자는 아들의 머리 위에서 고요한 목소리로 아들이 눈을 뜰 때까지 “분도야, 이제 일어나라. 학교 가야지. 이제 일어나야지.” 그런 목소리를 듣고 눈을 뜨면 항상 어머니의 눈이 저의 졸린 눈앞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아마도 제 삶의 원천이었던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겠지요? 우리는 사물이나 상황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기억하지만 많은 경우에 목소리로 상황들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문으로 들어오는 “양들의 목자”(10,2)는 양들을 부르고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목자를 따라 갑니다.

 

그 목소리는 우리를 ‘죽음의 골짜기’로 끌고 가지 않고 우리에게 평안한 풀밭으로 데려 갈 것이라는 신뢰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양들은 그 목소리를 쫓아갑니다.

 

하지만 도둑이요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입니다. 문으로 들어가기가 부끄러워서 그럴 수도 있을 테고 뭔가 엉큼한 속내를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그들의 소리는 양들을 살리는 소리가 아니라 죽이는 소리입니다. 양들을 살찌우는 풀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몰아 놓는 소리입니다.

 

“가만히 있으라.” 이 소리가 지금 우리 사회에 화두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그 소리가 304명이나 되는 목숨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도둑이요 강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국가기관들의 목소리는 또 다시 “우리가 다 해 줄 테니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고 고함지르고 있는 형국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이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은 자연의 소명일진대 왜 도둑이요 강도는 도둑질하고 잡아 죽이고 망치려고 덤비는 것일까요?

 

사실 바리사이와 대제관들과 예수님께 적대적인 이스라엘의 기득권층은 객관적인 사실 조차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9,18 참조). 무엇이 눈뜬 사람들인 그들로 하여금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예수님 당대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대제관들, 그들이 만들어 놓고 숭배하였던 그 틀들 -자신들이 창조한 새로운 우상, 최소한 자신들만이라도 그 우상을 숭배하고 그 우상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겠다고 착각한 -마치 세월호의 선박 승무원들처럼, 마치 이 난관에서 어서 도망치고 싶은 권력을 지닌 자들처럼 맹목적인 확신을 심어준 것 않은가요?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 죄인들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들 뒤에서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던 어린 학생들을 외면해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진실과 제대로 된 구조와 정보를 기다리던 유족들과 시민들을 외면해 버리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만, 우리만 안전하면 괜찮다고 생각하였던 그 생각과 마음이 그들로 하여금 도둑이요 강도가 되어버리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괴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도둑이요 강도는 우리 사회에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하다가 그만,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도둑질하고 잡아 죽이고 망치려는”(10,10) 짓을 벌입니다.

 

하지만 양들의 어진 목자(10,11), 양들의 문(10,7)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사람을 먼저 보셨습니다. 상황을 보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루카 3,22) “이는 내가 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늘과 구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을 먼저 낮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침묵의 방법이든, 겸양의 방법이든, 케노시스(kenosis)의 방법이든……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순간(필리 2,6-8 참조) 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고 나에게 맡겨진 양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지막이 우리를 부르시는 ‘거룩한 부르심의 소리-성소(聖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듣게 될 그 소리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어주고 또 얻어 넘치게 할”(10,10) 것이며 우리 역시 어느 누군가에게 생명을 얻어주고 또 얻어 넘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떤 소리인지 몹시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신종호 신부 (분도)
대구대교구 옥계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