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자의 주보성인인 성 마티아는 열두 사도 중 유다(Judas)의 배반과 죽음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도로 선출된 예수님의 제자(사도 1,15-26)이다.
성 마티아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흔한 이름인 마티티아(Mattithiah, 야훼의 선물)의 약칭이다.
열 두 사도로 선출된 사실 이외에 그에 관해 알려진 바는 없으나 후대 전설에 의하면 성 마티아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였던 72명의 제자(루카 10,1-12)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서에서"(사도 1, 21-22) 사도를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제안에 따라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가려서 앞에 세우고 나서 기도한 후 제비를 뽑아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하게 됩니다.
흔한 이름인 마티아가 제비뽑기를 통해서 마침내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신해 열두 사도단에 합류한 것은 그 이름이 뜻하는 그대로 "야훼의 선물", "하느님 은총"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강론 : (요한 15,9-17)
<내가 뽑았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이 말씀은 좁은 뜻으로는 사도들에 대한 말씀이고,
넓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뽑으신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교를 '자기가'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신들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예수님)을
'자기가'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선택했다는 것은 자기가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 되는데,
사람에 의해서 선택되기도 하고 버림받기도 하는 신이라면
그것은 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신을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하는가?
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느님(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모든 권한이 주님에게 있다고 고백하면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기도는 명령이 아니라 간청입니다.
협상이 아니라 애원이고, 희망입니다.
그러나 미신을 믿는 사람은 자기가 낸 복채만큼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복을 줄 능력이 없는 신이라고 판단되면 미련 없이 다른 신에게 갑니다.
많은 복채를 냈는데도 바라던 복을 받지 못하면
그 복채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종교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그냥 상거래입니다.
우선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의 어떤 직책이나 직분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아무도 잘난 체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직책을 맡기시는 것은
그 사람이 잘나서가 아니라 당신의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자신이 뽑혔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잘난 체 하면서 우쭐거리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뽑혔다면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권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섬김'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모든 직책은 봉사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교황이든 추기경이든 주교든 본당의 작은 직책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잘난 사람을 뽑으시는 분이 아니라 적임자를 뽑으시는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다른 열한 명보다 더 잘났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뽑힌 사람의 세속적인 배경이나 출신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학력이나 경력도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세속적으로만 생각하면
교황은 무식한 어부였던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보다 더 잘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뽑힌 사람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뽑히지 않았다고 해서
뽑힌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자기가 더 잘났는데도 뽑히지 않고
자기보다 못난 사람이 뽑혔다고 불평하고 시기 질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욱 못난 사람으로 만들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생활 전반에 적용해서 생각하면,
우리가 신앙인이 된 것은 큰 은총과 사랑을 받은 일이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지 못한 은총을 나만 받았다, 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이 무한한 사랑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덜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유일하다는 말을 수학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랑은 항상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그게 인류 전체를 향한 사랑이어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
각자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응답하고 신앙인이 된 것도 은총이고 사랑입니다.
응답했다는 것을 내세우거나 잘난 체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뒤에 회개하지 않고 자살해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뒤에 바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자기가 회개한 것을 자랑하고 잘난 체 할 수 있을까?
실제로 그랬다면 참으로 이상하고 우스운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도 사랑하셨고 베드로도 사랑하셨는데,
유다는 최종적으로 그 사랑을 거부했고,
베드로는 그 사랑에 응답한 것뿐입니다.
그가 회개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사랑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잘난 체 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응답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하지만, 먼저 겸손해져야 하고, 먼저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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