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5월 21일 가해 (성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dariaofs 2014. 5. 21. 02:41

 

 

크리스토발 마가야네스 하라(Cristobal Magallanes Jara)로도 알려진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또는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하라)는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 중에 반란을 선동했다는 날조된 혐의를 받고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한 순교자로서 가톨릭 교회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1869년 7월 30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토타티케(Totatiche)에서 농부였던 라파엘 마가야네스(Rafael Magallanes)와 클라라 하라(Clara Jara)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목동으로 일하던 그는 19살 때에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 있는 산 호세(San Jose)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30세에 과달라하라에 있는 산타 테레사(Santa Teresa)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같은 도시의 한 학교에서 교목신부로 봉직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토타티케의 본당신부로 임명된 후 학교와 목공예품 상점을 설립하고, 칸데라리아(Candelaria) 댐 건설을 돕는 등 고향의 발전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멕시코 서부 시에라마드레 산맥(Sierra Madre Mts.)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후이촐족(Huichol)의 복음화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아스퀠탄(Azqueltan)에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 마을에 선교 기관을 설립했다.

 

1914년 정부로부터 과달라하라의 신학교를 폐쇄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그는 자신의 본당에서 신학교를 열 것을 제의하였다. 1915년 7월 토타티케에 개교한 신학교는 빠르게 성장해 다음해 이미 17명의 학생이 등록했고, 학칙과 두 명의 교수를 파견해준 과달라하라 교구의 호세 프란치스코 오로스코 이 히메네스(Jose Francisco Orozco y Jimenez) 대주교로부터 승인도 받았다.

그는 무장반란에 반대하여 많은 저술과 설교를 했으나 오히려 그 지역의 크리스테로 반란을 도모했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체포되었다. 1927년 5월 21일 농장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에 체포된 그는 얼마 안 남은 소지품마저 사형 집행인에게 주었고 그들의 죄 또한 용서해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재판도 없이 4일 후인 5월 25일 할리스코의 콜로틀란(Colotlan)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 칼로카 코르테스(Augustinus Caloca Cortes) 신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그는 사형 집행인에게 “나는 결백하며, 나의 피로써 나의 멕시코 형제들이 일치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구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크리스테로 전쟁과 관련하여 희생된 24명의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시성되었다.

 

같은 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 신부와 최초의 멕시코인 성녀가 된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 7월 30일) 수녀도 함께 시성되었다.

 

강론   :   (요한 15,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1-2)."

 

이 말씀을 읽을 때 '다 쳐내시고'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모두 잘라버리겠다."

라고 위협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에 초점을 맞추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축복을 약속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고(마태 12,20),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마태 18,12-14).

또 아버지께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내라고 하셔도

예수님은 조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청하시는 분입니다(루카 13,6-9).

그러니 그런 가지라고 해도

어떻게든 열매를 맺게 하려고 더욱 보살펴 주시고 가꾸시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쪽의 노력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쳐내시는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가 아니라 스스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입니다.

따라서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나에게 붙어 있으려고 하지도 않고 열매를 맺으려고 하지도 않는 가지"이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붙어 있으려고 노력하고,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노력을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것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은 '완전한 일치'를 뜻하는 말인데,

서로 관계가 없었던 두 몸이 결합해서 한 몸이 되는 그런 일치가 아니라

원래 한 몸이었던 몸이 한 몸인 상태를 유지하는 그런 일치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라는 말씀은

"너희와 나는 한 몸이다." 라는 뜻입니다(1코린 12,27).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도

위협하시는 말씀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나와 함께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라는 축복의 말씀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

 

이 말씀에서 "너희가 원하는 것"이라는 말은

"나도 원하고 너희도 원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게 되면

한 몸으로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일치됩니다.

(일치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는 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는다면,

그런 경우에는 아무리 간절하게 청해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내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신학 이론 정도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안에 머무르다.' 같은 말은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또 지금 당장 어떤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느님(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이라는 말에 집중해야 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 12,26)."

우리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이고, 우리의 슬픔은 예수님의 슬픔입니다.

우리가 울고 있을 때 예수님도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요한 11,35).

그러나 무기력하게 눈물만 흘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이고(루카 7,13),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분입니다(루카 7,14; 요한 11,43).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내세의 행복과 구원만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에서는 불행하게 살다가 죽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니 지금 많이 힘들어도 믿고 희망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거워도 십자가의 길은 언젠가는 끝나는 길입니다.

 

<지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박한 소망이 기복신앙은 아닙니다.

그런 소망은 예수님도 바라시는 선(善)입니다.

물질적인 행복만을 바라는 욕심과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가 복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이 기복신앙입니다.

그런 기복신앙은 예수님이 바라시는 선(善)이 아닙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