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4년 5월 22일 가해 부활 제5주간 목요일(카시아의 성녀 리타 수도자)

dariaofs 2014. 5. 22. 03:21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고원 남단에 위치한 스폴레토(Spoleto) 부근 로카포레나(Roccaporena)에서 태어난 성녀 리타는 어려서부터 수도성소에 관심을 가졌지만 부모의 반대로 말미암아 12세의 어린 나이로 원하지 않았던 결혼을 하여 두 아이를 두었지만 18년간의 결혼생활은 불행하였다.

 

남편은 어린 아내를 학대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어떤 사람과의 싸움 끝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후 두 아들마저 죽게 되자 성녀 리타는 카시아의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세 번이나 입회 신청서를 냈지만 미혼이 아니라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강한 믿음과 인내는 결국 예외를 만들어 1413년 카시아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의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녀는 지난날의 생활을 반성하며 자신처럼 불우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철저한 고행과 기도생활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녀는 수차례나 환시를 체험하였고, 1441년에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과 꼭 같은 상처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카시아의 수도원에서 선종한 후 그녀의 성덕과 기적에 대한 평판이 높아져 성녀의 유해를 중심으로 새 성당이 건축되었다.

 

성녀 리타는 1626년 7월 16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00년 5월 24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봉사한 리타 성녀는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강론   :   (요한 15,9-11)

 

<사랑>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예수님께서 지키신다는 '아버지의 계명'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계명을 내려주신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은 '인류 구원'입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사랑 안에 머무르다."는 "사랑으로 일치하다."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뜻,

또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완전하게 하나로 일치되어 있고, 그 일치가 곧 사랑입니다.

 

'내 계명', 즉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사랑으로 일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

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는 "서로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또 불우이웃 돕기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함께 하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우리도 뒤따라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내가 살기를 바라니까 다른 사람들을 살려야 합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는 이기심과 사심이 없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은

인간들에게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인간들을 위해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이 말씀에서 '기쁨'은

'하느님 나라, 구원, 생명, 행복, 평화'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도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천당에 가기 위해서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그곳이 천당입니다.

참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지 그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에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말하면, 사랑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지옥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에 지옥입니다.

어쩌면 지옥이라는 곳은, 하느님의 벌을 받기도 전에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파괴하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악성 댓글로 다른 사람에게 지옥과 같은 고통을 주는 경우,

그런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은 이미 지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 글을 쓰면서 혼자서 느끼는 즐거움은 사탄의 쾌락입니다.

사탄이 있어야 할 곳은 지옥뿐입니다.

 

자기만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또는 죽게 내버려두는)

사람들의 모습에서(요한 11,50) 우리는 지옥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생존 본능이다." 라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그런 변명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자인하는 말이 될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능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서도 외면하고 그냥 가버렸습니다(루카 10,31-32).

그들은 사제와 레위인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도 잃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도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루카 16,19-21)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 사람을 살리다가 목숨을 잃은 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천국을 보게 됩니다.

그분들은 육신의 목숨은 잃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참 사랑'이 '참 사람'이 되는 길이고,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