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9,23-26)
<방학숙제>
신학교 신입생 시절 여름방학 때, 두 가지 방학숙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화란 교리서'를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었습니다.
(화란 교리서 - 네덜란드 교회에서 만든 교리서로
교황청의 공식 가톨릭 교리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가장 잘 만든 교리서라는 평을 받았음.)
'화란 교리서'는 꽤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그것을 방학 기간 동안 모두 옮겨 적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옮겨 적으면서 교리를 확실하게 복습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에 그 일에 아무런 '의미'를 못 느끼고,
생각 없이 그저 베껴 쓰기만 했다면
그 일은 정말로 의미 없는 노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매일미사 참례, 고해성사, 영성체, 성체조배, 영적독서, 묵상 등을
신학교에서 하듯이 똑같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그것은 숙제라고 할 수도 없고,
신학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인데,
방학 기간이었기 때문에 통제를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알아서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인생'을 귀양살이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정처 없는 나그네 길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소풍이나 순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인생을 일종의 방학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귀양살이로 생각하는 사람은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인생은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이라는 말은
종교도 없고 신앙도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소풍이나 순례나 방학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생이란 하느님에게서 나와서
다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여정'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방학숙제와 같고, 하느님의 심판은 숙제 검사와 같습니다.
똑같은 숙제라고 해도
어떤 사람에게는 고역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즐거운 일이 됩니다.
'왜' 그걸 해야 하는지를 알고,
그걸 다 했을 때 자기가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
숙제 자체가 즐거운 일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도 목적도 생각하지 못하고 억지로 한다면
그건 그냥 쓸데없는 고생이 될 뿐입니다.
만일에 신학생들이 두꺼운 교리서를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 귀찮아서
다른 사람에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면,
또는 복사기로 복사를 했다면,
그건 정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고,
그건 숙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남이 대신해 줄 수도 없고
편하게 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 같은 것도 없는 생활입니다.
즐기고 싶은 일을 다 즐기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또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싫은 일이라고 해도 해야 한다면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한다면 참아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고지식하고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생활은 많이 고지식한 생활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왜 그렇게 인생을 힘들게 사는가?
좀 편하게 살면 안 되는가?" 라고 말하는 세속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분명히 알고, 그래서 힘들어도 참고
고지식하게 계속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힘들어도 참는 것', 그것이 바로 '순교정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십자가'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신앙인에게 십자가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바로 그 일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말은
'신앙인으로서 지금 날마다 하고 있는 바로 그 일이
각자의 십자가'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없는 십자가를 어디서 찾아내서 지고 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당연하게 하는 것 자체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생색낼 것도 없고 호들갑을 떨 것도 없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이 구절에서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은 진짜로 쓸모없다는 뜻은 아니고,
스스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를 꼭 괴로운 일이나 고통으로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의무감이나 책임감이나 인내심만으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왜 고통입니까?
힘들어도 기쁨이 있고, 어려워도 보람이 있고,
그 자체가 행복한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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