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핵심·자기이해 131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4)유아 세례와 신앙교육

신앙의 기쁨과 환희를 자녀에게 청년들에게 유아 세례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면 종종 이렇게 답할 것이다. “저는 유아 세례 안 받게 하고, 아기가 커서 스스로 종교를 선택하도록 할 거예요. 아기에게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까요.” 언뜻 합리적인 말로 들린다. 실제로 유아 세례를 받게 하고 주일학교에 보내서 신앙교육을 받게 했는데, 막상 자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왜 나의 의견도 묻지 않고 나를 신자로 만드셨나요?” 특히 ‘자유’에 대한 젊은 세대의 감수성은 이전 세대와는 크게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유아 세례를 받도록 하는 것이 좋은 건지, 아니면 자녀가 성인이 될 때를 기다렸다가 스스로 신앙을 선택하도록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한 강론에서 이 문제에 관..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3)자유의 교육학 (3)한계 지어진 자유

반항과 갈등의 시간 거쳐 다져지는 신앙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한계 지어진 자유이기도 하다. 나 말고 다른 자유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자유는 크게 제약받는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인간은 살면서 자기의 자유를 제약하는 수많은 장애물을 만난다. 인간의 타고난 조건이 원래부터 그렇기에, 한 인간이 얼마나 성숙했는지는 자유의 한계를 얼마나 수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때, 아이가 인격적으로 올바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혹은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 어우러져 살면서, 아이는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해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배우며 성장하게 된다. 성경은 이 진리를 원조들의 타락 이야기를 ..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2)자유의 교육학 (2)

“뽈(바오로), 넌 이 신학교에서 자유롭단다. 그런데 너에게 하나의 의무가 있으니, 바로 자유로울 의무야.” 필자가 프랑스 유학 시절 신학원 영성지도 신부님께서 첫 영성 면담 때 하신 말씀이다. 자유로울 의무. 이 역설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은 결코 남이 대신해줄 수 없고, 스스로 걸어야 하는 길이다. 그렇기에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롭지 못하면 결코 응답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는 양성되어야 한다. 뿌려진 씨에 물과 거름을 주고 정성스레 가꾸어야 하는 것처럼, 자유 역시 정성스럽게 가꾸고 돌보고 보살펴야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자유로운 신학원 생활이 처음엔 좋았지만, 갈수록 고통스러웠다. 주어진 자유가 너무 편했지만 동시에 생소하기도 했다. 힘들었던 것은, 그..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1)자유의 교육학 (1)

자유롭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기쁨 신앙하면 많은 경우 의무와 순종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신앙은 자유와는 무관한 것, 혹은 자유와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구원받기 위해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믿고 계명을 지켜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단순히 의무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바라실까? 의무로 성당에 나오지만, 전혀 기쁘지 않은 얼굴로 오는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실까? 교회는 신앙이 지성과 의지의 순종이며, 자유롭고 자발적인 응답이라고 가르친다. 무엇에 대한 응답인가? 하느님 자녀로 사는 삶으로의 초대에 대한 응답이다. 그 삶이란 고역과 짐이 아닌 기쁨과 환희의 삶, 하느님 자녀로서 누리는 진정 자유로운 삶이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에 나오는 큰아들은 동생이 ..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0)자유와 순종 사이에서 (2)하느님의 교육법

시행착오 거치며 제자리를 찾아가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아버지의 명을 받은 두 아들의 이야기가 있다.(마태 21,28-32 참조)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습니다’하고 답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꿔 일하러 갔고,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하였지만 끝내 가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이는 맏아들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인생 역전’, ‘막판 뒤집기’ 등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느님도 결코 자녀에게 강요하지 않으신다. 찾고 물으며 스스로 답하기를 바라신다. 당신 뜻을 헤아리며 따를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교육법이다. 신앙은 자발적인 순종이다. 처음에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경험을 통해 신앙 안..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9) 자유와 순종 사이에서(1)

하느님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신앙은 자발적인 순종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말이다. 순종이면 순종이고 자발이면 자발이지, 어떻게 자발적인 순종인가? 이분법적 관념에서는 불가능하나 신앙에서는 가능할 뿐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일 수 없다. 이 역설을 조화롭게 사는 것이 쉽지 않기에 한쪽만 강조하다 신앙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신앙 성장의 길에서 둘을 조화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인의 성숙도는 그 둘을 얼마나 조화시키며 사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떤 신자가 말씀하셨다. “신부님, 저는 집에서는 가장으로, 사회에서도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왜 성당에만 가면 고개 숙이고 아무 말 못 하고 주눅 들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8) 좋은 밭으로 가꾸어가는 신앙

믿음의 싹 틔울 마음 밭 일구기 우리는 소비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의 대상이 돼버린 듯하다. 심지어 영적인 것조차 상품화되어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향유하는 소비문화가 쓰레기 양산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종종 잊는다. 신학교에서 후원 회원을 위한 피정을 준비하면서, 500명이나 되는 방문객을 대접하기 위해 도시락 이야기도 나왔지만, 쓰레기 문제로 인해 학교에서 직접 국과 밥을 준비하기로 했다. 국 하나에 김치, 깍두기가 전부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사랑이 피정객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줄 거라 기대해 본다. 소비시대에 살다 보니, 신앙도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신앙은 소비의 대상이 아니며, 성당은 서비스 센터가 아니다. 신앙인이 소비자와 다른 점은, 계속해서 변화와 성..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7) 익어가는 술처럼

인격의 완숙과 함께 무르익는 믿음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 참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늦게까지 남겨 둔 좋은 포도주에 대한 과방장의 찬사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늦게까지 남겨둔 ‘좋은 포도주’에서 그리스도 신앙인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일까? 포도주가 사람의 마음을 흥겹게 하듯, 예수님과 함께할 때 삶은 흥겨워지고 자기도 모른 채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 참조)를 풍기기 때문이다. 좋은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맛도 향기도 깊어진다. 시간이 갈수록 익는 것은 포도주만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인품이 깊어지며 존경심을 자아내는 사람이 있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오랜..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6) 하느님 자녀로 사는 삶의 기쁨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느끼며 기쁘게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삶은 흥겨운 잔치로 변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름답게 표현한 문구다. 요한 복음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요한 2,1-12 참조)로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린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기에(요한 1,14 참조), 그분과 함께하는 우리 삶은 포도주와 같이 마음을 흥겹게 하는 잔치가 된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잔칫집에 술이 빠질 수 없듯, 그리스도인의 삶에 예수님이 빠진다면 ‘앙꼬 없는 찐빵’처럼 무미건조하고 무기력할 것이다.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요 흥겨운 잔치다. 이것이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다. 실제로 예수님은 삶을 잔치처럼 사셨으며, 그 기쁨의 삶으로 모든 사람을 초대하셨다. 예..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15) 하느님 자녀로 사는 삶의 매력

매력적인 예수님을 닮는 것이 우리 몫 우리는 종교와 신앙에 무관심한 혹은 적대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신앙에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세속화된 사회는 그리스도인에게 공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특히 우리가 사는 믿음의 삶이 세상 사람의 눈에 어떤 매력으로 드러나는지 묻는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여기서 ‘희망’을 ‘매력’으로 바꾸어,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분이 지닌 매력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매력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한다. 그분은 당시 많은 군중을 몰고 다니실 정도로 매력적인 분이셨다. 사람들은 놀라운 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