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화,과학,군복음화 860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5) 최인호 베드로 (상)

소설로 우리 시대 대중문화를 선도한 최인호 책 「눈물」에서. 강렬한 인상 “저는 키가 작아요. 165㎝이니까 아주 작죠. 몸무게는 53.5㎏입니다. 머리칼은 곱슬곱슬한데 이빨은 반 옹니죠. 최(崔)가에 곱슬머리에 옹니백이는 상대도 하지 말라죠. 제 이마는 좀 좁아요. 못생겼거든요. 그런데다가 턱이 팽이 끝처럼 뾰족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머리를 가르마질하면 그야말로 트위스트 김 같거든요. 전 눈이 작아요. 그런데 속눈썹은 길어요. 남들이 그러는데 제 눈이 사슴처럼 맑다고 해요.” 이 글은 월간지 ‘엘레강스’에 실린 최인호(베드로, 崔仁浩, 1945~2013)의 ‘나의 사적 이력서’의 한 부분이다. 그가 삼십 대 초반에 쓴 글이다. 책 표지에 인쇄된 최인호의 얼굴은 인상적이다. 긴 머리에 짙고 까만 눈썹 그..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4)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하)

주님, 진실하고 따뜻했던 어머니가 하늘에서 더 행복하게 하소서 소설가 박완서씨 환갑 기념 축하식 성탄 자정 미사, 기쁨과 감동 솟아올라 박완서가 가톨릭 신앙을 갖기로 결심한 후부터 세례받을 때까지 몇 년 걸렸다. 이유는 동네에 성당도 없었고 성당으로 인도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일에 명동대성당에 가보긴 했으나 신앙과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잠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곳 아파트 단지 내에 성당이 있었다. 그해 성탄절이었다. 텔레비전에 성탄절을 맞은 명동대성당의 모습이 나왔다. 갑자기 성당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아파트에 있는 성당으로 갔다. 상가 4층에 자리 잡은 성당이었다. 신자들도 너무 많아 복도와 계단까지 꽉 찼다. 무질서했다. 그런데 미사가 시작되자 질서가..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11)실재론 대 반실재론

과학 이론들이 기술하는 세계는 진리로서 존재하는가 -과학적 실재론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실체들도 실제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입장 -과학적 반실재론 과학 이론은 진실 얻는 것 아니라 정확한 예측 돕는 도구로서 이해 20세기에 들어와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철학적으로 묻고 탐구하는, ‘과학철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철학 분과가 생겨나면서부터 ‘과학이 다루는 지식/개념/이론이 과연 실재하는 것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이 대두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의 많은 과학자들이 옹호하고 있는 과학적 실재론(scientific realism)은 ‘과학은 우리들의 인식과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로 존재하는 대상으로부터 정확한 지식, 개념, 이론을 통해 진리를 얻어내는 작업’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실재론자들에 따르면,..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2) 천상병 시몬 (하)

‘귀천’ 노래한 시인, 하늘나라 주님 앞에 ‘감사하다’ 외치리라 천상병 시인과 아내 목순옥. 시인의 아내는 몸도 마음도 약한 남편을 평생 보살피며 함께 했다. 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천상병은 술을 무척 좋아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술을 마셨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와 어울려 다니면서 마셨다. 술 중에서도 막걸리를 제일 좋아했다. 막걸리를 예찬하는 시를 지을 정도였다. 그는 막걸리만 마시고 산 적이 있었다. 막걸리가 밥이었다. 식사를 거부하고 곡기를 일절 끊고 오직 막걸리만 마셨다. 막걸리는 한 시간에 한 잔씩 시간과 양을 정해 놓고 정확히 마셨다. 그렇게 사니 간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수십 일 동안 내리 설사만 하였다. 배가 임산부의 배같이 부풀어 올랐다. 발도 퉁퉁 부어올랐다. 병명은 간경화였다..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1) 천상병 시몬 (상)

하루 용돈 2000원에 미소 가득, 천생 시인 천상병 천상병 시인은 순수하고, 가난하지만 작은 것에도 기뻐했다. 주머니에 토큰 몇 개, 막걸리 한 잔 값만 있어도 하루가 행복했다. 살아 있는 시인의 유고집 겨울이었다. 시인 천상병(시몬, 千祥炳, 1930~1993)이 갑자기 사라졌다. 친한 벗들에게 늘 웃음을 선사해 주던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천상병을 찾아 나섰다. 그가 갈 곳이라고는 서울의 명동이나 종로 그리고 부산의 광복동이나 남포동밖에 없었다. 그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었다. 그래도 천상병은 나타나지 않았다. “죽지나 않았을까?”, “아냐, 죽을 리가 없어. 천상병이 어떤 사람인데? 불사신이야!”, “돈도 없고 배도 고프고 병이 나서 한없이 떠돌다 쓰러졌는..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10)갈릴레오 사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힘없는 과학자에 대한 교회의 과도한 권력 행사 문제일까 오랫동안 유럽 지성인들은 갈릴레오를 ‘박해받은 순교자’ 인식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해석은 과학철학의 ‘실재론’ 문제로 대두돼 크리스티아노 반티 ‘종교 재판에 선 갈릴레오’(1857)김도현 신부 제공 갈릴레오 사건이 이렇듯이 비극적으로 마무리가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당시 교회 교도권의 권위를 갈릴레오가 무시·손상했다는 혐의’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이 혐의로 인해서 두 차례의 재판을 겪어야 했던 것이죠. 이 혐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성경 해석에 관한 교회 교도권의 독점적 권위를 그가 훼손시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당시에 세속적 결정권을 갖고 있던 교회 교도권의 권위를 그가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에 관..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20) 김세중 프란치스코 (하)

광화문 ‘충무공상’ 조각한 김세중, 공공조각의 선구자 김세중 작가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 점토원형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최태만 논문 공공조각에 사상을 담다 김세중(프란치스코, 金世中, 1928~1986)은 공공조각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가 처음 제작한 작품은 전 국민이 모금한 돈으로 건립한 ‘유엔 참전 기념비’였다. 6·25전쟁 때 공산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기념탑은 제2한강교(현 양화대교) 북쪽 끝에 약 55m 높이로 세워졌다. 그런데 이 기념탑은 도로를 확장하느라 안타깝게도 철거되었다. 기념비의 전면과 후면에는 ‘자유의 여신상’과 ‘승리의 남신상’이 조각되어 있고, 기념비 아래에는 ‘광복’, ‘건국’, ‘전쟁’, ‘유엔의 도움과 재건’이라..

[신원섭의 나무와 숲 이야기] (49·끝) 이팝나무

이팝나무가 만드는 하얀 천국 5월 초 한창 봄이 무르익고 햇살의 뜨거움을 느낄 무렵이면 이팝나무 꽃이 희고 아름답게 핀다. 꽃이 아름다워 가로수로 많이 심어져 있다. 몇 년 전 대전에 거주했을 때 자운대로 지나는 큰 도로를 지나갈 때면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이팝나무 가로수가 마치 터널을 이뤄 꽃 천국을 운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만큼 이팝나무 가지에는 마치 함박눈 송이가 달려있는 듯 꽃이 가득 피어있어 환상의 광경을 연출한다. 멀리서 보면 나무 한 그루가 솜사탕처럼 흰색으로 싸여있다. 이팝나무의 학명 역시 ‘키오난투스 레투사’인데 흰 눈이란 뜻의 ‘키온’과 꽃이라는 ‘안토스’가 합쳐진 흰눈꽃나무란 뜻이다. 배고팠던 시절에는 흰 쌀밥 한 그릇 실컷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을 때가 있었다.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Ⅱ] 갈릴레오 재판 사건 (9)제2차 갈릴레오 재판(1633년)

지동설 계속 지지하다 종교 재판… 불순명에 의한 유죄 판결 천동설과 지동설 비교한 서적 출간 인기 얻으며 논란의 도마 위 올라 결국 교황청 재판에 소환되고 판결 뒤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가 조제프 니콜라 로베르-플뢰리 ‘교황청에서의 갈릴레오’.(1847·루브르박물관 소장) 갈릴레오는 유죄 판결 직후 그 자리에서 추기경 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선고된 형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행위를 “잘못과 이단”이라고 선언했다. 갈릴레오는 1623년 8월에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Maffeo Barberini·1568-1644)이 우르바노 8세 교황으로 즉위한 이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는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주목할 활동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9) 김세중 프란치스코 (상)

가톨릭 거장들 속에서 성장한 김세중은 ‘한국의 미켈란젤로’ 서울 혜화동성당 전면 부조 최후의 심판도 앞에서 김세중(오른쪽에서 두 번째) 작가와 장발(왼쪽에서 두 번째) 작가. 출처=최태만 논문 중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청동의 녹 위에 꽃잎을 피운 사람/ 그 더운 가슴으로/ 영원의 사랑 안에 쉬다” 김세중(프란치스코, 金世中, 1928~1986) 1주기 추모비에 이어령이 쓴 글이다. 김세중은 실로 돌의 내면에 불을 켜고, 청동의 녹 위에 꽃잎을 피운 사람이었다. 그는 1000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58년의 짧은 생에 비해 무척이나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다. 김세중은 우리나라 공공조각과 종교조각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로..